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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Sep 06.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스물째 날

San Martine de Laspra-Soto de Luina 31km

2023.05.03


발목이 시큰시큰 아파 일어나니 아직 새벽 5시이다. 오늘은 방에 혼자 있는데 잠을 푹 자지를 못했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찌감치 잠을 접고 천천히 짐을 정리한 후 식당으로 내려가 차를 마시며 아침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아침은 과일과 토스트, 뮤즐리가 준비되어 있어 걷기 전 탄수화물을 든든하게 먹었다. 아침을 먹는데 마리아가 해가 뜨는 순간을 알려준다. 뒤돌아 있어 놓칠뻔한 일출이다. 외면하고 있으면 존재해도 안 보이는 것이 많다.


오늘은 천천히 출발할 예정이라는 체코 아저씨와는 이제 작별 인사를 나눌 때가 왔다. 아저씨는 혹시 체코에 놀러 오면 나중에 다시 만나길 바란다며 명함에 이메일 적어 건네주셨다. 나도 그동안 걸으며 동지가 되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떠나기 전 San Martine de Laspra 표지판

배낭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찾는다. 순례자들의 신발은 보통 현관에 따로 벗어두는데 오래 걸어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신발을 찾으러 문을 여니 신발장 옆에 놓고 간 우산이 많이 보였다. 3주 동안 우산이 벌써 두 개나 망가져 혹시 우산 하나 가져가도 되는물어보니 다 두고 간 것이라며 하나 고르라고 다. 그래서 내 망가진 우산은 버리고 지팡이 겸 쓸 수 있는 조금 녹인 슨 중고 장우산을 하나 얻어 문을 나섰다.

아기 송아지와 엄마 소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계속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압박붕대를 둘렀더니 새벽보다 발목이 많이 아프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짧지만 매우 가파른 언덕을 넘으니 벤치가 보였다. 벤치엔  한 여성분이 담배를 태우며 쉬고 계셨는데 나도 옆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린다고 앉아 배낭을 내려놓고 땀에 젖은 바람막이도 잠시 말릴 생각으로 벗어 우산에 걸어놨다.


벤치에 앉아 인사를 건네는 사이 갑자기 등과 목, 엉덩이가 따끔따끔하더니, 생각도 못한 모기떼가 옷을 뚫고 나를 7군데나 물었다. 그 바람에 손바닥으로 어깨와 등을 찰싹 때리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린 곳은 금세 부풀었다. 옆의 여성은 나의 모기 해프닝을 웃으며 쳐다보더니, 담배를 다 태운 후 내게 “저 짧은 산이 어지간히 힘들지 않아요?”라고 말을 건넨다. 이 분은 왜 모기에 하나도 안 물렸지 속으로 궁금해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시 순례길을 동행했다.

벤치 아래 보이는 마을

이 레이디는 독일 사람으로 스위스와 런던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 프랑스 길을 3번 걸었고 북쪽 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둘 다 프랑스길 다녀와봐서 그런지 이야기가 제법 잘 통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다른 여러 길 중 프랑스길만 3번이나 걸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북쪽과 다른 점을 이야기할 때마다 맞아, 맞아, 하며 서로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같이 걷다가 담배를 한 대 피우시려는지 쉬었다 다시 출발하겠다고 하여 짧은 동반이 끝이 났다.

하얀 성당을 지나쳤다. 시계가 12시 46분에 멈춰 있다.

오후 1시가 되었다. 스페인은 1시가 넘으면 해가 머리 꼭대기에 위치하며 엄청 뜨거워진다. 눈 밑과 콧등에 이미 기미가 많이 올라 터라 나는 더워도 긴팔을 입고 모자를 쓰며 최대한 햇빛에 노출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오늘 바에서 뉴스를 보니 스페인 남부는 40도에 다다른다고 한다. 다행히 북쪽은 아직 27도. 그렇지만 태양이 뜨거워 체감 온도는 40도인 것처럼 걸을 땐 배낭을 멘 등이 얼마 되지 않은 땀에 흠뻑 젖는다. 


이 태양 아래 한참 걷는 중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다가 멀리 녹슨 폐차된 자동차들과 이동식 주택이 몰려 있는 곳이 보였다. 느낌상 이곳은 집시가 사는 곳 같았다. 이런 곳은 아무리 대낮이라도 혼자 걸어가면 무섭다. 숨을 참고 6시간을 걸어 지칠 대로 지친 다리로 순간 이동하듯 이곳을 빠르게 지나려는데, 갑자기 주택 사이에서 남자가 불쑥 나와 너무 놀랐다. 작은 목소리로 ‘올라’하고 내 앞을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앞의 차에서 다른 남자 한 명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내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듯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들도 놀란 내 얼굴을 보고 더 놀랐으리라.


별 일이 없었음에도 땅에 떨어진 내 심장을 다시 주워 담고 집시촌을 벗어난 후, 잠시 멈춰 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에서 ‘올라’하는 여자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제 알베르게의 순례자 중 다른 한 분인 네덜란드 여성분이었다. 그분도 역시나 나를 보자마자 집시촌 지나갈 때 너무 무서웠다며  말을 꺼내신다. 뒤에서 내가 굉장한 속도로 지나가는 것을 보시곤, ‘그래, 저 girl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데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빠르게 지나오셨다고 다. 놀라 목이 타셨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내게도 물 한 모금을 나눠주셨다.

알고 보니 우린 오늘 머무는 알베르게가 같았다. 나는 오후에 에너지가 모두 떨어지는 편이라 이 분을 먼저 앞으로 보내드리고 굉장히 천천히 걸었다. 오늘따라 오후 해가 너무 뜨거워 지열이 얼굴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집시촌을 빠르게 걸어오며 모든 긴장이 다 풀린 탓인지 굉장히 굉장히 거북이 같이 느린 속도로 걸으며 저녁 6시 반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하였다.

 수채화 같은 바다와 나무, 노란꽃과 집

숙소에 도착했을 땐 오늘이야말로 고된 하루였는지 알베르게 주인 내외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숙소까지 30분을 남겨두고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너무 도착하지 않자 천둥번개도 치고 산 속이라 혹시나 내가 길을 잃진 않았나 걱정이 되어 내게 전화를 했었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씻고 오늘 입은 옷을 모두 세탁을 맡겼는데, 저녁을 다 먹고 나니  직접 드라이까지 해주셔서 뽀송뽀송한 옷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길에 매일 손빨래를 해서 세탁을 맡긴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금 내 옷은 겉옷이며 속옷이며 매일같이 손세탁을 하느라 문지르고 비틀어 실밥이 터지고 작은 구멍이 송송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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