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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Sep 07.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스물한 번째 날

Soto de Luina-Barcia and La Almuna 33.27

2023.05.04


산티아고에 온 이후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있는데 오늘 새삼 느낀 것이 있다. 걷기 시작한 초반에는 주로 그 하루에 있었던 일에 대한 내 느낌을 주로 는데 어느새부턴가 내 일기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살면서 어쩌면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을 순례길이라는 한 시공에서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은 매일 반복되면서도 늘 다르고 특별하다.

산티아고까지 251km 남았다.

오늘은 어제 만난 네덜란드 레이디와 길을 나섰다. 어제저녁 식탁에서 알베르게 주인분과는 스페인어로, 나와는 영어, 우리 앞자리에 앉은 프랑스분들과는 불어로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직업이 무엇인지 여쭤보니 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언어학자, 그리고 이전에는 오랫동안 출판업계에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 언어에 능숙한 것이었다.


출발하기 전, 신발을 신고 있는데 레이디가 현관에서 거울을 보며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칭찬은 속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문을 열면서 '걷기 전에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멋있어요.’라고 하자 고맙다고 하며, 사실은 예전에 프랑스길을 걸을  때 립스틱을 바르는 자신에게 순례자답지 않게  립스틱이냐며 핀잔을 주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늘 그렇게 말해주어 그때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 같다며 고맙다하셨다. 그들이 생각했던 순례자답지 않다는 것이 무엇이며, 순례자다운 것은 무엇이라는 .


이 말을 들으니 나도 다시금 프랑스 길에서 만난 아저씨가 나에게 '지금 한창때 여기서 인생낭비를 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 떠올라 나도 그런 쓸데없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건 그냥 입술이 떠드는 것일 뿐 뇌를 거친 어떤 사고가 아니므로 그런 말은 무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살면서 타인에게 빨간 립스틱을 바른다며 무엇답지 않다고 지적질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입술로 떠들어댄 적이 분명히 있다. 프랑스길 780km를 걸을 때에도, 지금 600km를 걸어오면서도 문득 예전의 못난 행동과 생각이 떠올라 후회하고 사죄하면서  걸었고 걷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내가 매일같이 성당을 찾아갔었나 보다.

고양이 4마리

레이디는 올해 63세라고 하셨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아 산을 타는 내내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특히나 오늘은 해변 길을 따라 6개 봉우리 마을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힘든 여정이었는데 힘들었었다는  저녁때 새 자리에 물집2개나 더 생긴 것을 보고 깨달았을 정도로 즐겁게 걸었다. 이게 다 레이디의 프랑스 순례길 얘기, 집에 두고 온 아들 두 명에 대한 이야기, 과거 학생들을 인솔하여 스페인에 답사를 했던 얘기 등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 덕분이었다.

6개의 봉우리를 다 넘고 나온 마을에서 같이 카페콘라체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레이디는 호기심이 굉장히 많은 분이다. 그동안 길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사진첩에는 오늘 도마뱀이 싸우는 모습을 순간 포착한 것까지 들어 있었다. 특히, 네잎 클로버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신기했다. 길을 걷다가 네잎 클로버가 있을 것 같다는 센서가 울린다는데, 지난주 아주 큰 네잎 클로버를 찾아 순례길 안내서에 끼워 놓고 갖고 다니고 있다며 보여주셨다. 놀랍게도 이 날 저녁 숙소 앞에서 또 네잎 클로버를 찾았다며 나중에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셨는데, 네잎 클로버를 들꽃처럼 쉽게 찾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몰래 계산을 하셔서 내 커피까지 사주셨다. 더치페이가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데, 난 카미노 길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커피를 두 번이나 얻어 마신 한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다시 길을 걷는데, 레이디는 사실 오늘이 카미노에서 걷는 마지막 날이고 내일은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 콤포스텔까지 이동한 후 하룻밤 자고 토요일 비행기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마지막 날을 이렇게 힘든 6개의 봉우리를 넘는 코스로 마무리하게 된 셈이다. 카페를 나온 후 2시간쯤 더 걸은 후 나는 15km를 더 걸어야 했고 레이디는 숙소에 도착하여 아쉽게 작별인사들 해야 했다. 다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작지만 독특하게 기와로 지붕을 얹은 멋스런 작은 옥수수집

늦은 오후가 되자 어제처럼 몸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천천히 걸었다. 계속 웃고 떠들며 걸어서 그런지 갑자기 혼자된 순례길은 긴 아스팔트 길만큼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치만 언젠가는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마련이다. 


알베르게 앞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곳 담당자에게 예약할 때 문이 열려 있으니 들어가 쉬고 있으면 저녁 8시쯤 체크인 수속을 하러 들릴 것이라고 했었다. 예고대로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동안 사람이 찾지 않은 빈 집처럼 먼지가 쌓여있고 거미줄이 쳐진 침대와 주방보였다.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알베르게에서 혼자 하룻밤을 자야 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워 그냥 다음 마을까지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이미 사온 저녁거리가 있기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이 샌드위치를 다 먹으면 다음 마을 호텔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 문이 열리며 2명의 소녀들이 들어왔다. 인사를 하며 사실은 아무도 없어 여기서 자기가 무서워 다음 마을로 가려던 참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겁먹은 내가 재밌었는지 "Girls are strong" 하고 뽀빠이 자세를 취해주며 분위기를 다독여주었다.


자세히 보니 이 젊은 레이디들은 오늘 오전 산봉우리를 넘으며 앞서거니 뒤서가니 인사를 주고받던 소녀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체코에서 왔다고 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체코 아저씨가 생각나 얼마 전까지 체코에서 온 아저씨와 걸은 적이 있다혹시 만난 적 있는지 물어보니, 본인들도 아직 순례길에서 체코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했다.


침대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데 아무래도 숙소에 먼지가 너무 많이 이대로 잘 수가 없어 빗자루질을 시작하였더니 역시나 먼지가 정말 많이 쌓여있었다. 8시가 30분 더 지나서야 담당자가 도착하였다. 체크인을 마무리하고 담당자는 10분 만에 퇴근하여 다시 셋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화장실에 욕조가 있어 난 이왕 숙소를 청소하는 김에 욕조도 빡빡 문질러 청소한 후 모처럼의 반신욕을 즐겼다.


앉아서 가닥가닥 발가락을 살펴보는데 발 뒤꿈치에 엄지발가락만 한 물집이 생기고 아물어 가던 두 번째 발가락에 다시 크게 부푼 물집을 발견했다. 하루종일 불편한 느낌이 들어 신발 속에 돌이 들어간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물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서서 샤워했으면 모를 뻔했다.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니 피도 같이 섞여 나와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오늘은 도깨비 동굴에 들어온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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