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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Sep 08.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스물 둘째 날

Barcia and La Almuna-Navia 23.43km

2023.05.05


어쩌면 혼자 잤을 수도 있었던 무서운 밤이 다시 아침이 되었다. 오늘은 San Roque 옆 Navia라는 마을에 있는 평이 좋은 숙소에서 자기로 했다. 약 23km.

오랜만에 혼자 걷는 길이었다. 어쩌다 보니 늘 곁에 하루 이틀 만나 같이 걸었던 사람들과 함께 걸었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혼자 걸으니 자유로운 이 느낌이 좋다가도 쓸쓸하기로 하였다. 쓸쓸한 느낌은 외로운 것과 조금 다른데, 누군가 곁에 있다가 없어져 혼자가 되어 허전한 그런 느낌이다.


두 시간을 걸어, 9시 반쯤 Luarca에 도착했다. 어젯밤 숙소에는 와이파이가 없어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은행 앞 인터넷이 잡히는 곳을 찾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네덜란드 교수님이 카페 문에 몸이 반쯤 나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차피 인터넷과 커피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카페로 들어갔다. 이 카페는 마치 호텔 로비의 커피숍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었는데 커피를 시키면 큰 페스츄리 반 조각을 커피잔 옆에 같이 세트로 주는 카페였다.

하트 라떼와 애플파이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에는 이미 3개의 잔과 페스츄리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님이 오늘 산티아고의 마지막 날이라서 호화스러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바탕 웃었다. 그때까진 난 커피를 시키면 빵도 같이 주는지 몰랐는데 조금 뒤 나에게도 커피와 예쁘게 담긴 페스츄리가 함께 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잘못 갖다 주신 줄 알았다. 페스츄리는 무작위로 선택되는 거시 같았는데, 나는 애플파이였다. 아침에 커피와 애플파이라니, 그냥 지나쳤을지 모를 카페에서 예상치 못한 행복한 아침이다.

Luarca 전경

별안간 어떻게 여기에 계시는지 물어보니 교수님은 어제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이 마을에 도착했고 오늘 저녁 기차를 타고 산티아고로 갈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 여쭤보니 아무 계획 없이 동네 구경하고 시간이 남으면 머리라도 할까 생각 중이라고 하셨다.  이 레이디의 이런 발상이 너무 좋다. 일어나는 나에게 집에서 가져온 순례길 가이드책을 선물로 주시려는데 난 집에 기념품으로 가져가시라고 정중히 사양했다. 가서 아들들에게 물려주면 그들도 산티아고를 걸을 것이라고.

16세기에 지어진 St.Santiago 성당, 지금은 터만 남았다.

그렇게 짧은 뜻밖의 만남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했다. 마을을 벗어나 조금 가파른 언덕 길을 들어섰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눈앞에 불에 탄 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불이 났거나 일부러 소작한 것인 줄 알았는데 걷는 길 내내 2시간 정도 불에 탄 산을 지나야 했다. 불에 탄 냄새로 목이 칼칼한 것은 차치하더라고 이렇게 넓은 방면에 산불이 난 것을 보게 된 건 태어나서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안타까운 산을 동영상에 담고 있는데, 이럴 수가, 여우 한 마리가 멀리서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날까 싶어 계속 카메라는 준비하고 걸었는데 아쉽게도 여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불에 탄 나무와 땅

산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건너가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려가고 있는 나와는 반대로 올라가고 있는 2명의 남녀를 마주쳤는데 그들은 동키와 함께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동키가 내게 인사를 하려는 듯 내 앞에서 멈추자 동키를 끌고 가는 아저씨가 너무 거칠게 동키 코를 두 손가락으로 낚아채더니 강제로 앞으로 끌고 가려했다. 너무 불쌍한 동키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 당신들 등에는 배낭 하나 매지 않고 모두 동키에게 짊어 지웠는데 그것 또한 동키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순례길은 그들이 아닌 동키 혼자 걷는 듯했다. 부디 동키가 순례길 남은 여정에 너무 혹사당하지 않길 바란다.

오후에 들린 카페, 하몽을 커피와 같이 받은 건 처음이었다.

산을 다 내려오니 드디어 오늘 하룻밤 지낼 마을 Navia에 도착했다. 숙소는 마을 입구 쪽에 있어 찾기가 수월했다. 사립 알베르게가 가정집 같지 않고 마치 공용 알베르게처럼 시설이 되어 있고 매우 깔끔했다. 주인아저씨가 영어를 잘하셔서 모처럼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내일 머물 예정인 숙소에 대해 문의하니 직접 전화까지 해서 예약을 확인해 주시고, 내일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Navia 마을 호수

그리고 빨래를 다 하고 햇볕에 널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시길래 오는 길에 불에 탄 산을 지나왔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봤다. 아저씨는 5주 전 이쪽 지방에 산불이 크게 나 뉴스에도 나왔었다고 다. 난 자연발생한 산불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누군가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5월, 한창 녹색과 꽃으로 뒤덮여 있어야 할 산이 새까맣게 불에 탄 모습으로 남겨진 모습은 마음이 아프다. 흙도 나무도, 그리고 터전을 뺏긴 동물들도 빠르게 회복되길 기도했다.

Navia 시내와 오래된 멋스런 건물의 약국

저녁시간이 거의 다 될 무렵 이럴 수가, 다시 체코 아저씨와 재회하게 되었다. 아저씨가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고 계셨다. 오늘 이 알베르게에서 머물고 내일도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 예정이라 하셔서 예약하는 것을 도와드렸다. 난 저녁거리를 살 겸 아저씨에게도 마트에 가실 건지 물어봤는데, 레스토랑 노, 마트 예스, 하고 하시길래 마트에 간다고 하니, 알겠다고 하시며 곧 준비하고 나오셨다. 마트로 가는 길 작은 동네 구경을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며 마트로 향했다. 그런데 아저씨가 뜻밖에 저녁 초대를 해주셨다. 마트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는지 구글 번역기로 마트에서 내일 먹을거리를 사고 저녁을 초대할 테니 바에서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그렇게 하여 마트에서는 내일 아침과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 재료들을 사고 저녁은 동네에서 제법 큰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Navia 마을은 인심이 후한가보다.

식당에 들어간 시간이 저녁 7시 40분이었는데, 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저녁 메뉴는 8시부터 주문이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20분은 와인을 마시며 기다렸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 종업원은 두 번이나 스낵!이라고 하시며 하몽을 얹은 작은 바게트, 치즈를 얹은 작은 바게트를 주시고, 8시가 되어 메뉴를 시키자 작은 그릇에 다시 한번 스낵!이라고 외치며 우리나라의 다진 돼지고기에 주물럭 양념한 것 같은 음식에 계란 프라이, 프렌치프라이 조금 담긴 식전 간식을 주셔서 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배가 부르게 되었다.

아저씨 접시만큼 큰 돈가스와 나의 Austrias 지역 수프

8시가 되어 메인 메뉴를 시켰다. 아저씨가 시킨 메뉴는 약 30cm 정도 길고 제법 두꺼운 치즈돈가스 같은 메뉴였고 나는 Austrias지방 특산 수프인 콩과 햄, 돼지고기가 들어간 스튜를 시켰다. 국물 요리를 먹은 지 오래됐는데 스튜는 이 메뉴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저씨 덕분에 오랜만에 든든한 저녁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거의 밤 9시 반이 다 된 시간이었다. 알베르게가 닫을까 봐 서둘러 돌아와 잠 잘 준비를 하였다. 배가 여전히 불러 잠을 언제 잘 수 있을까 싶지만 하루 종일 걸어서 그런지 그래도 잠은 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스페인의 늦은 저녁 시간은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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