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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Aug 11.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첫째 날

Irun-Pasaia 18.94km

2023.4.14

새벽 6시 반, 미사곡과 함께 알베르게에서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주방으로 내려가니 이미 식탁에 작은 빵과 커피,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잔뜩 설렌 탓인지 어제 오후 공항에서 내려오는 길에 견과류와 두유를 마신 것이 전부였던 것 치고는 아침에도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커피를 따르고 있는데 Hostello가 오시더니 산티아고 상징인 노란색 화살표와 2023 산티아고 북쪽길이 쓰인 작은 기념품을 주셨다. 시작하는 날 작은 선물에서 느껴지는 이런 생각지도 못한 따뜻함이라니.

커피를 마시며 우리 삶도 이렇게 작지만 순간순간의 따뜻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도, 앞으로의 순례길도 작지만 따뜻하여 그 따스함이 차가운 몸을 녹이는 축복으로 가득 채우길.

순례자의 표식인 조개껍데기


알베르게에서 아침 테이블은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함께 산티아고를 첫날을 시작하는 사람들,  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함께 걷고 종종 마주칠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간단히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서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다.  


이번 순례길은 네덜란드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 듯한다. 내 주변 분 모두 네덜란드에서 왔다고 하였다. 지난번 프랑스길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네덜란드 날씨와 꼭 닮은 북쪽길이라서 그런지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을 다 먹고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짐을 챙겼다. 해가 뜨고 난 뒤 밝은 8시에 출발한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를 닦고 나오니 숙소에 달랑 나 혼자 남아 있어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신발을 신고 나오니 문밖에 아침 테이블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눈 Anna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먼저 Shall we go? 하고 물어봤는데 나처럼 느긋하게 나오다 같이 걸을 심산으로 문 앞에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우린 그렇게 처음 1시간 반 정도를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걷게 되어 어쩌면 다음 숙소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계속 걸은 지 약 5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어젯밤 알베르게비에 젖어 널어놓은 빨래를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다시 돌아가면 왕복 3시간을 추가로 걷는 셈인데, 일단 되돌아가기로 하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내려가며 마주치는 순례자들은 의아하게 날 본다. 애써 밝게 부엔 카미노를 외치며 내려갔지만 갈수록 울상이 되어 갔다. 다시 되돌아 올라갈 생각이 까마득하기도 하고 알베르게가 닫혀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려가면서 전화를 여러 차례 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10시 30분쯤 도착하여 굳게 닫힌 정문을 두르려 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비는 세차게 내리고 나는 어제의 그 형광 연두색 우비를 쓴 순례자가 되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40분을 기다렸을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봉사자 분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신 것이다. 나는 올라! 를 외치며 빨래를 두고 왔다고 설명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가니 빨래는 Donation Box에 예쁘게 놓여 있었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옷을 다 챙겼으니 이제 시간과 마음을 리셋하여 다시 순례길의 첫 번째 날을 시작할 차례였다.


인생처럼 처음 올라간 길은 모르는 길이라서 설레지만 이미 아는 길은 지루하지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아침에 올랐던 길은 그 사이 내린 비로 진흙이 되어, 좀 전 오르고 내린 산 비탈길이 다소 미끄러웠다.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걸은 지 5시간이 지나자 오늘 머물 예정이었던 알베르게 앞에 도착하였다. 총 8시간을 걸은 것이다. 내 앞에는 4시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5명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몸에 바람이 세차게 부니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4시를 10분 앞두고 알베르게가 문을 열어 순례자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작지만 다 들어있는 내 짐가방과 오늘 산 넘을 때 주운 지팡이

오늘 숙소는 와이파이, 부엌, 빨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Bed만 있는 곳이다. 요리를 해 먹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침대에서 앉아 충전기를 꽃은 휴대폰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데, 계단으로 Anna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갈림길에서 헤어졌던 Anna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 나는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빨래 때문에 알베르게를 다시 갔다 온 것을 설명하고 Anna는 안타까운 소리로 힘들었겠다고 대꾸해 주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숙소 오는 길에서 스쳐 지나갔던 레이디가 내 맞은편 침대에 배정되었다. 배낭이 정말 커서 기억이 났는데 미국에서 온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Meredith는 이런저런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도 안 된 순례길 이야기를 하다 너무 배가 고픈 우리는 추운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물로 씻은 후 숙소 아래에 있는 Bar로 향했다. 이야기꾼 아우라가 느껴지는 Meredith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3일 동안 계속 슈퍼에서 파는 음식만 먹어 누군가의 손으로 조리한 따뜻한 음식이 간절히 먹고 싶다고 하였다. Meredith의 간절한 소망 덕분에 오늘 저녁은 따뜻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시간이었다. 이 바에는 순례자 메뉴가 따로 있지 않았다. 난 비 때문에 뼈까지 흠뻑 젖은 몸을 녹이기 위해 핫초코와 포타타 또르띠야인 감자오믈렛을 시켰다. 이 감자 오믈렛은 작년에도 종종 먹었지만, 오늘 먹은 것이 정말 정말 가장 맛있었다. 촉촉하고 얇게 썰은 감자가 들어있는 오믈렛.

Meredith는 아랍어를 할 줄 알며, 북아프리카에서 진행 중인 연구로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간단한 음식을 놓고 끊기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어서 그런지 평범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웃음 포인트를 아는 사람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본인이 미국 국교회 목사를 하고 있다고도 했는데, 역시 이야기를 잘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낯선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크게 웃었다.

Pasaia 어촌마을 전경. 건너가려면 작은 배를 타야 한다.

숙소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일 시작하는 길은 작은 보트를 타고 길을 건너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보트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Anna가 오늘 슈퍼 가느라 탄 보트 사진을 보여주며 작고 귀여운 보트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Meredith는 아니면 수영하는 방법도 있고 한 10km 돌아서 가는 길도 있다며 농담을 한다.


내일 중간 지점인 Orio에서 자려고 했던 알베르게가 닫아 아마도 오늘처럼 많이 걸어야 할 예정이다. 내일은 스페인의 제법 큰 휴양지 San Sebastian을 지나기 때문에 대도시에서 아침  커피와 또르띠야를 사 먹을 수 있다.


일 저녁은 숙소에서 간단하게 밥을 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딜 가든 내가 만든 밥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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