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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Aug 25.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둘째 날

PASAIA-ASKIZU QUARTWE(GERARIA) 36KM

4월 15일 토요일


정말 많이 걸었다.


아침 8시가 되기 조금 전 애나, 메러디스, 그리고 애나와 어제 만나 같이 걷고 계신 네덜란드에서 오신 나이가 조금 있으신 아저씨, 더치 성함을 들어도 외우지 못했다, 이렇게 숙소를 떠나 보트를 타기 위해 슬슬 걸어갔다.

보트는 정말 애나가 말한 것처럼 작고 귀여운 녹색 보트이다. 건너편 선착장으로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정말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통통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리고 보트에서 내려 각자 갈 길을 가게 되었다.

보트에서 내린 후의 길은 계속 산을 오르는 등산길이다. 오르고 계속 오르고, 옆을 보면 바다가 눈에 확 들어온다. 비가 내려 안개가 끼어서 바다의 파란색, 하늘과 안개의 하얀색, 그리고 나무, 땅에서 보이는 흙색이 섞여 보이는 풍경마다 참 아름다운 색이 눈에 담겼다.

보트 선착장, 건너편까지 건너가는 작은 보트가 보인다.

오늘은 산 세바스티안을 지나 많이 걸을 예정이다. 원래대로라면 약 26km 만 걸으면 도착할 Orio 지역  알베르게에서 머물 수 있지만, 지금은 닫아서 대부분 그다음 도시로 넘어가 하루 머무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럴까 했지만 숙소 후기가 참으로 그랬다. 하룻밤 자는 곳이지만 조용하고 깨끗한 곳을 찾아 그 다음다음 마을의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파사이아에서 시작한 등산길은 산 세바스티아까지 가는 길 내내 산을 넘는 오르막길이었다가 도시의 전경이 산 아래로 보이고 하얀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일 때쯤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약 3시간 반을 걸어 도시에 도착하였다.

산 세바스티안 전경


산 세바스티안은 스페인 서부의 큰 휴양지로 4월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갈래의 골목에는 익숙한 의류 브랜드, 카페,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고 시내 중심에 대성당도 있어 도시를 지나기 전 대성당에 들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빵가게에 들러 바게트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30분쯤 쉬고 나자 오늘 갈 길이 머니 처음 만난 큰 도시를 떠나 걷기 시작했다. 내려온 만큼 다시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려 안경에 맺힌 빗방울 때문에 시야가 자꾸만 가려졌다. 그러다가 길을 잃는 것이다. 안경을 닦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어디 골목길을 내 멋대로 걷고 있다. 그럴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 방향을 찾아보려 하는데 비가 내리니 휴대폰 화면 또한 방울방울 빗물이 맺혀 잘 안 보이고 만다. 그래도 계속 걷다 보면 나처럼 배낭과 나무 지팡이를 들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보이면 길을 찾은 것이다.

프랑스 길을 걸을 때 들린 도시에서도 항상, 반드시 길을 이렇게 잃고 마는데, 길을 잃을 때마다 보이는 도시의 골목 곳곳이 참 즐거웠다. 처음 와보는 도시 속에 다양한 가게와 목적이 분명한 간판, 지나치는 사람들 속에 방향이 정해진 길을 찾아 걷고 있는 내가 신기한 기분이다.


산 세바스티안을 지나고 산을 넘어 다시 작은 어촌 마을 Orio가 나올 때까지 으니 벌써 오후 3시가 되었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땅은 도자기를 만드는 고운 흙처럼 질척거려 신발이 도자기색이 될 지경이었다. 내일은 날이 맑을 텐데, 하루만 늦게 걸었어도, 오리오의 숙소가 닫지만 않았어도 등등의 가정법 과거를 생각하며 계속 길을 걸었다.

작은 어촌 마을 Orio


길을 걷다 보니 내일이 일요일인 것이 생각났다. 스페인의 일요일은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 없다. 마트조차 닫으니 그 말인즉슨 지금 걸으면서 Orio를 떠나기 전 내일 식량 또한 구비를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서둘러 구글 지도를 열어 마트를 찾아 오늘, 내일 먹을 빵과 샐러드, 치즈, 두유를 산 후 더욱 무거워진 짐을 들고 계속 걸었다. 문득, 다음 마을의 내가 가려는 숙소는 후기가 좋고 12명 밖에 자리가 없어 늦게 도착하면 혹시 자리가 다 찼을까 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엔 한 번도 예약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북쪽길은 사람이 적긴 하지만 그만큼 지금 운영 중인 알베르게 수가 제한적이고 4월인 지금 아직 개시를 하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랑스 길 때와는 다른 조바심이 생긴 것이다.

첫날 길을 걸을  때 작년처럼 숙소 때문에 서둘러 걷지 말아야지 했지만, 이번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는가의 문제가 생겨버렸다. 오늘처럼 숙소와 숙소 사이의 거리가 먼 곳도 앞으로 또 있을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전화를 했을 때 “1명 예약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오리오 인데, 3시간쯤 걸릴 예정입니다.” 하고 상황을 설명한 후 무사히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숙소 예약을 하고 나마음이 편했다. 아직 3시간을 더 걸어야 하고 그때가 오후 4시 반이었지만 잘 곳이 확보되니 이젠 도착만 하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걸었다.

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질까 봐 걱정했지만 8시 무렵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다행히 날이 밝았다.


숙소에 도착하여 "올라, 알베르게?" 하고 인사를 건네니, 사장님께서 텔레폰느? 하고 확인해 주셨다.

아침 8시에서 저녁 8시로 바뀌고 나서야 드디어 걷기를 멈출 수 있었다.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젖은 비닐봉지 같은 나를 맞이해 주신 주인아주머니의 짠한 듯한 눈빛에 마음이 조금 울컥했다.

이번 숙소는 정말 운이 좋게도 혼자 싱글룸처럼 방을 쓸 수 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젖은 옷가지를 말리기 위해 방 곳곳에 옷걸이로 옷을 걸어둔 후 카운터에 내려가서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꾹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싱글룸에 자게 된 것은 주인아주머니께서 배려를 해주신 것이었다. 다른 방엔 침대가 3개씩 있어 알베르게까지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방을 같이 쓰는 것인데, 주인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싱글 룸을 내주신 것이었다.


12시간을 배낭 메고 걸은 다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야 그나마 근육통이 덜하여 조금씩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하여 샤워, 빨래, 체크인까지 모두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어제 인터넷을 하지 못했기에 이메일과 메시지를 확인하고, 걸음 수 어플 적립도 완료하니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자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아까 사 온 바게트를 반으로 잘라 샐러드와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중간중간 욱신 거리를 몸을 달래며 잠을 청했다. 싱글룸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행운에도 불구하고 너무 걸어서 그런지 잠은 거의 자지 못했지만 내일은 16km만 걸을 예정이어서 그런지 누워있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누워있으면서 내가 오늘 이렇게나 먼 길을 걸었고, 중간중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계속 이기며 결국 오늘 목표로 한 곳에 도착해서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아기였을 때부터 하던 매일 걷고, 먹고, 자고 하는 반복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돌아간 것인데, 여기에 소일거리로 빨래하는 것을 더하면 어린 시절에 하던 단순한 삶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렸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매일 얼마큼 걸을 것인지, 어느 방향을 선택할 것인지 등 내가 세운 매일매일의 작은 목표를 이루니, 작은 성취감이 이 길고 먼 계속 걷게 하는 연료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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