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오징어 - 내가 왜 거기서 나와?

by 하루오

나는 또 머뭇거리고 말았다. 사먹으면 그만일 것에 6,500원의 타당성을 묻고 있었다. 6,500원이면 건면 5개 한 묶음을 사고 1,550원, 시세에 따라 느타리버섯 6~8팩을 사고 몇 백 원이 남았다. 혹은 500원을 더 보태면 짬뽕 한 그릇이고, 1,500원을 더 보태면 통으로 튀긴 닭 한 마리였다. 마른 오징어는 간단하게 기각되었다.


가성비의 산수가 지겹다. 엄마라면 먹이지 않을 것들을 내게 먹여 왔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들의 총합은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아니었다. 생각이 미각에 앞선 축생이었다. 취향의 실각이 인생을 감가삼각 하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으면서도 살아온 관성을 막지 못했다. inTj에게 합리성은 그 자체로 취향이었다. 15년 넘는 합리성이 쌓여 몰취향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인생이라 생각했던 시간은 도축 되어 순장되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사물이 색깔을 잃듯 취향은 윤곽만 남았다.


생활관(館)이어야 할 방이 생활관(棺)이 되는 생활관(觀)을 지닌 인간에게 마트는 쓸데없이 넓었다. 마트는 취향만큼의 공간이다.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하는 것은 정해져 있으므로 동선이 한정적이었다. 대형 마트는 전성기 지난 창녀의 교태처럼 안쓰럽기까지 했다. 압도적 물량으로 시각을 교란하고, 각종 판촉 행사로 후각을 어지럽히지만, 내 욕구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파격 세일이나 1+1 행사 상품만 나를 유혹했으나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늘 행사 중이므로 공산품은 인터넷으로 사고, 신선식품은 동네 마트에서 샀다. 동네 마트에서의 내 동선은 간결했다.


그날은 무심코 동선을 이탈해 마트를 빙빙 돌다가 마른 오징어를 발견한 것이었다. 졸업 앨범을 뒤지다가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한 때 친했던 친구 사진을 보며 잠깐 멈칫한 기분이었다. 반가움은 6,500원으로 가볍게 무마되었다. 어차피 길 가다가 그 친구를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세월이었다. 안다고 해도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며 모른 척 지나갈 것이었다. 몰취향의 무덤 속에서 나이보다 낡아버린 미라가 된 나를 보여주기 민망했다. 그런데 머뭇거림으로써 마주해 버린 것이었다. ‘무려’ 마른 오징어였다. 무덤 속의 유물이 출토되어 부식되듯, 마른 오징어와 닿자, 나는 ‘고작’으로 낡아버렸다.


30년 전후에는 그냥 마른 오징어였다. 아버지의 취향이었다. 술안주는 아니고 어른의 과자 같은 것이었다. 당시 마른 오징어 가격이 기억나지 않으므로 아버지의 벌이가 마른 오징어를 취향으로 삼아도 타당한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식료품 구매는 엄마 몫이었고, 엄마는 합리성의 기준이 나와 달랐다.


단단하고 질긴 식감이 좋았다. 씹을 때마다 잇몸에 힘이 팽팽하게 차올랐다. ‘질겅질겅’으로는 성에 안 찼다. 저적운동으로 잇몸이 으깨져 내 육즙이 새 나올 정도로 ‘찌일꺼엉찌일꺼엉’해야 했다. 내 것인지 오징어의 것인지 모를 짭조름한 육즙이 침에 섞여 입 안을 염장하고, 침 거품이 파도거품처럼 입 안을 휩쓸었다. 그쯤 되면 오징어를 말렸다기보다는 바다를 단백질 블록으로 압축한 것에 가까워졌다. 전투적으로 바다를 씹고 나면, 바다 사나이의 성취감, 정복감 같은 충만감이 차올랐다.


다리보다 몸통, 몸통 중에서도 머리(사실은 지느러미)를 좋아했고, 눈알(사실은 입)에 집착했다. 특별히 맛있다기보다는 그냥 희소성 때문인 듯했다. 어느 부위든 탈 만큼 바싹 구운 게 좋았지만 엄마는 태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구워주는 게 좋았다. 내가 구우면 한 쪽으로 말려 들어가 반대쪽이 굽히지 않았지만 엄마는 골고루 구우셨다.


마요네즈와의 궁합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먹었다. 당시 내게 마요네즈는 느끼하기만 한 하얀 오물이었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름기가 오징어를 만나니 단단한 것이 촉촉해졌고, 짠 것이 고소해졌다. 납득할 수 없는 조화를 명백히, 나는 좋아했었다.


마른 오징어와 연이 끊긴 이유는 내 생활에서 과일이 사라진 것과 같았다. 안 먹어도 괜찮은 것을 굳이 먹지 않는 것이 자취생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정도 사 먹을 여유는 생겼다. 나는 며칠 간 마른 오징어가 신경 쓰였고, 신경 쓰이는 사실이 짜증났다. 6,500원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이었다.


인터넷으로 샀다. 역시, 온 것은 사지 못했다. 여전히 ‘굳이’는 힘이 셌다. 구멍이 나고, 다리 한두 개 없고, 모양이 나쁘다는 이유로 묶인 파품은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찌일꺼엉찌일꺼엉’의 바다와 마요네즈였다. 예쁘든 못나든 씹으면 다 같은 마른 오징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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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유물은 구릿구릿한 냄새만으로 복원되었다. 밥 비벼 먹을 때 참기름 대신 넣으려고 샀지만 결국은 참기름에게 밀려 방치되고 있던 마요네즈를 돌돌 말린 오징어 배에 뿌렸다. 다리 하나(맛있는 건 뒤에 먹어야 해서 다리부터 먹었다)를 마요네즈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래, 그 맛이었다. 내 취향은 잠들어 있을 뿐, 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기특했다. 몇 번 씹지도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마른 오징어를 좋아한다.


취향 하나를 되찾았건만, 이제는 잇몸이 아팠다. 손바닥 반만 한 다리를 먹었을 뿐인데도 이에서 잔뿌리라도 나는 듯 잇몸이 얼얼했다. 통증과 열감이 뒤섞인 불편함을 무시하고 한 마리는 먹었지만, 두 마리는 무리였다. 그 정도의 전투도 노병에겐 감지덕지였다. 내게 남은 마른 오징어의 시간은 우리가 헤어져 있던 시간보다 길지 않을 것 같았다. 체중관리 때문에 첫날 이후로 마요네즈도 먹지 않았다. 좋아할 수 있을 때 더 격렬하게 좋아할 걸, 해봐도 늦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겠구나. 시시한 중년이 되고 보니 인생은 거창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먹고 싸다 죽는다. 인간 개인은 죽기 전까지의 시간을 파는 상점이다. 수명을 팔아 행복을 구매한다. 나는 꿈이 행복이라 여겼다. 꿈을 향한 속도전에서 내 꿈이 아닌 것은 최저가/가성비의 합리성으로 계산하는 것은 행복 공식이었다. 그러나 꿈이 별처럼 멀어지고 보니 나는 2030시절이 파산된 파품(破品)이었다. 크로노스가 결여된 카이로스의 잔해, 무(無)취향의 무덤을 지키는 미라, 그게 나였다. 영양가도 없이 맛대가리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마른 오징어는 내 지각(知覺)이 지각(遲刻)이 아님을 온 몸으로 말했다. 말랐기에 맛있었다. 오징어회도 있고, 오징어국도 있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마른 오징어가 으뜸이었다. 늙은 자취생의 파생(破生)도 제대로 씹으면 맛있어 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 속수무책으로 속을 수밖에 없는 그 헛것이 입 안에 짭조름하게 고여 들었다. 마른 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채권자의 농담을 내게 던질 때다. 무취향의 시간들은 내게 빚을 졌으니 그것을 꼭꼭 씹어 문(文)즙으라도 짜낸다. 맛있었으면 좋겠다.


맛있는 것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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