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들어올 때 눈뽕 오진데요.”
“천국의 입구는 원래 빛으로 찬란한 거야.”
천국을 믿지 않았지만, 천국이 있다면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온 호의가 나를 격렬하게 감싸 안는 듯했다. 고요한 호들갑 속에서 세상이 안온해진다. 스마트팜 들이길 잘했다. 그것도 출입구에.
내가 보는 내 방은 늘 불이 꺼져 있다. 내가 들어가야만 불이 켜진다. 내가 어둠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둠의 마침표가 되어 나로써 어둠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 문장은 고요를 의미한다. 방을 가득 채운 고요는 불빛으로부터 물러설 생각 없다. 문득 돌아가는 냉장고 소리로 고요의 깊이가 가늠된다. 나는 어둠의 긴 여음이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어둠의 다음 문장이 시작된다. 나는 본격적으로 어둠을 읽는다. 추상적이었던 나의 어둠이 눈앞으로 흩어진다. 모든 사물이 색채를 읽고 윤곽만 남는다. 몸에 익은 불면으로 지칠 때까지 어둠을 읽고, 또 읽는다. 나와 어둠, 어둠과 나는 농도가 다른 동음이의어임을 안다. 그러나 별 수 없고, 별 수 없는 것들이 농축된 것이 이미 나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빛을 고도처럼 기다려왔다는 것을, 스마트팜을 사고서야 알았다.
인간은 의외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만만한 게 ‘나’다. 시장사회에서 나를 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 나는 나를 쥐어짠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내가 되어야 하는 교실이데아에 충실하다 보면 내가 나를 착취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나는 나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기 착취에 도덕적 망설임이 없다. 착취로 고갈된 ‘나’를 이끌고 하루하루를 방치하며 빈 방에 빈 것을 채워 넣는 탈진의 중첩, 자취였다.
스마트팜을 산 것은 공부방에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학원에 간다는 것은 선생을 만나러 가는 것이므로 공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나는 식당을 선택할 때 인테리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커피 맛의 상향평준화로 인테리어로 승부 보는 인스타 감성 카페를 한심하게 여기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 학부모 상담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자 공부방의 어둡고 너저분한 입구가 신경 쓰였다. 공부방에 들어서면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바로 보였다.
가릴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밝았으면 했다. 불을 켜면 밝은데도 ‘밝음’이 옵션으로 붙는 것은 의외였다. 당시는 내 욕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처음으로 내 공간에 타인을 들이는 중이었다. 자취방에는 누군가를 들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뭉개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생명력’이라는 새로운 옵션이 추가되어 스마트팜에 이른 듯했다. 13만 원쯤 줬다. 모든 존재를 기능성으로 설명하며 스마트폰조차 샤오미가 ‘정당’한 인간이 인테리어에 지불하는 13만 원은 파격이었다.
스마트팜 사용 세 달째, 최근 3년 이내 가장 잘 산 물건은 단연 스마트팜이다. 5년으로 넓혀 봐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대기업 제품은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지만, 중국산인지, 국내 중소기업에서 만든 제품인지 모를 스마트팜은 내 목적을 기대 이상으로 충족했다. 초기에는 반신반의했다. 스마트팜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led 등이 16시간 동안 켜졌다가 8시간 꺼지기를 반복하는 플라스틱 상자에 불과했다. 여기에 물 순환 펌프가 달려있는 게 고작이었다. 회사 측 영업이익률이 알차겠다 싶을 만큼 투박했다. 여기서 무슨…… 그러나 한 달 후, 무한 상추 시대가 열렸다.
상추도 모소 대나무처럼 퀀텀 점프했다. 모소 대나무는 4년 간 자라기는커녕 싹도 내지 않다가 5년째가 되는 해에 6주 만에 15미터 이상 자란다고 한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상추도 새끼손톱 반만 한 싹을 틔워 놓고 한동안 자라지 않았다.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조금 크기 시작하네.’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잔뜩 흔든 사이다 뚜껑을 땄을 때처럼 연초록 존재감을 하루 단위로 뿜어냈다.
상추는 성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생물 같았다. 수확하고 3-4일 뒤면 또 수확할 만큼 자라 있었다. 한 번 수확할 때, 2인이 삼겹살을 알뜰하게 나눠 먹을 정도는 됨직했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상추 때문에 삼겹살을 구웠다. 다이어트 중이므로 삼겹살을 먹는 날, 밥은 먹지 않았다. 고기 한 점에 상추 서너 장씩 깔았다. 삼겹살을 굽지 않을 때는 상추를 대충 찢어 비벼 먹었다. 비바람을 모르는 상추는 잎이 연해서 먹기 순했다.
비빔면을 먹을 때, 녹색 채소를 넣어 먹으면 급격한 혈당 상승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50칼로리를 더 먹었음에도 살은 덜 찌고 몸에 이로운 것이다. 공부방의 식사도 단순하고 건강해졌다. 귀차니즘은 자취생의 실천 원리다. 도보 1분 거리에 함바집이 생겼지만, 그마저도 왕복하기 귀찮고 한 번 가면 과식해대서 공부방에 올 때 삼각 김밥이나 편의점 도시락을 사왔다가 끼니 때 먹었다. 삼각 김밥 한 입에 상추 두세 잎이면 그럭저럭 쌈밥이었고, 돼지고기에 자극적 양념으로 맛을 낸 편의점 도시락은 상추만 더해져도 집밥보다 푸짐해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출입문을 열었을 때, 환한 것이 좋았다. 공부방 문을 열면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이 쏟아졌다. 십 수 년 동안 나를 맞이하는 것도, 나를 배웅하는 것도 늘 어둠이었다. 그것이 칙칙한 일인지 몰랐는데, 스마트팜을 들이고 나서는 빛이 주는 생기를 알아버렸다. 단순 인테리어 조명이 아니라 연초록 이파리에서 튕겨 나왔기에 빛은 싱싱하고 산뜻했다. 나는 인사처럼 스마트팜 상추 숲에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들이켰다. - 나는 빛을 보고, 빛을 먹는다. 나는 빛이다.
그런 착각이 필요했다.
천국에서 이 글을 쓰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또 어둠이 나를 맞을 것이다. 내 방은 공부방 월세의 반도 안 되고, 그 가격만큼 좁다. 스마트팜을 들일 공간이 없다. 그러나 내 가방 속에는 천국에서 수확한 상추가 있다. 부처나 예수의 후광처럼 삼겹살 뒤로 풀빛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