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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Feb 05. 2021

연말 시상식 - 연대와 권위 몰락

걔가?


시상식 다음 날 기사를 보고 알았다. 그가 연예 대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가 해당 방송국에서 출연한 방송은 2개였는데, 하나는 처음 들어보는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은 들어봐서 알고 있지만 그가 출연하는지는 몰랐다. 그의 대상 수상은 지상파 방송사들의 몰락을 자백한 셈이었다. 시청자로서의 우리는 연말 시상식을 보며 ‘도란도란’할 수 없어졌다.


방송사는 누구에게 상을 주든 시끄러워서 누구에게나 상을 주었다. 소속사마다 적당히 분배되었을 때 공정해지는 상은 공신력을 잃었다. 특히 가요는 이미 지상파 방송사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갑이 을에게 주는 것은 상이지만, 을이 갑에게 주는 것은 감사패였다. 공신력 없는 감사패는 가요톱10 시절 골든컵보다 권위가 없었다. 가요 시상식은 자연 소멸되었다.


드라마나 예능 시상식은 초라해져갔다. 가수들이야 방송 출연 없이도 활동할 수 있지만 드라마와 예능은 아직 방송 비중이 높았기에 방송사가 출연자에게 상을 주는 행태는 유효했다. 그러나 그들의 ‘상’은 ‘잘한 일이나 우수한 성과를 칭찬해주는 표적’에 부합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무한도전]에게 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던 MBC도 배부르던 옛날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프로그램을 차려 놓고 벌이는 잔치는, 보는 이가 더 민망했다. 게다가 상을 부분별로 쪼갰고, ‘핫-’이나 ‘베스트-’를 뒤집어 쓴 상을 신설한 것도 모자라 공동수상까지 남발했다. 나는 학원에서 같이 일하자고 연락받고 기뻐하던 때가 떠올라 그런 상을 받고 기뻐해야 하는 연기자의 자괴감부터 생각했다. 이래저래 구질구질했다.


연령별 가산점으로 대상은 대상은 [세바퀴]에게.


관심은 대상에게만 모아졌다. 대상 수상자는 내 시청 유무와 무관하게 화제성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탔었다. 그들은 해당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중심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상 수상자도 내가 1회도 본 적 없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이유로 상을 타기 시작하더니 2020년 그가 수상함으로써 변해버린 시대에 최종 직인(職印)을 찍어버렸다.


이제 대중은 없다. 팬덤의 시대다. 수많은 플랫폼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양산해 냈고, 대중이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만 탐식했다. 이들은 팬덤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정 성향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형태는 대중보다 팬덤에 가까웠다. 구독자수 100만 명이면 ‘유명 유튜버’가 될 수 있으므로 4900만 명 쪽에 속하는 내가 유명인을 모르는 일이 허다했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몇 갑절 많아도 부여되는 ‘유명하다’는 사전적 정의가 바뀌어야 할 판이다.


그래서 누구신데요?


팬덤이 일찍 형성된 가요에서 이 현상이 도드라졌다. 내 가수 노래가 아니면 잘 몰랐다. [무한도전]의 ‘토토가’가 90년대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가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에 무관심했던 나조차 90년대 가요의 대략적인 노랫말을 따라했다. 2040년에 2020년이 소환된다면 코로나 이외에는 소환될 만한 대중성 있는 음악도, 콘텐츠도 글쎄다. BTS의 ‘다이너마이트’도 대중성은 글쎄다. 기껏해야 내게 지겨움으로 기억되는 트로트 정도일까. 같은 이유로 각종 예능에서 행해지는 음악을 듣고 제목을 맞추는 코너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요즘도 2010년대 노래가 나와 버리면 재미가 없었다.


공유물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게임


어렸을 때는 좋든 싫든 문화를 공유했다. TV가 한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취향을 따라갔다. [서울뚝배기]나 [엄마의 바다]가 초등학생 취향일 리 없었지만 그냥 봤다. 보다 보면 나름 재밌었다. 다른 집도 대동소이해서 KBS와 MBC 사이에서 엇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SBS가 개국해도 삼지선다여서 대중은 유효했다. 최소한 한 가정 내에서는 대중문화 동질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연말 시상식은 방송사의 잔치이기도 했지만 우리 식구의 연말 문화 정산이기도 했다. 함께 고스톱(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한테 배웠다. 엄마는 나와 동생이 모아둔 용돈을 합법적으로 수거해가셨다.)을 치면서 연말시상식을 봤다. 시상식은 신인상-우수상-(공로상)-최우수상-대상 정도로 간소했고, 공동 수상을 남발하지 않았다. 후보는 거의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누가 상을 받게 될지 예상을 교환했고, 예상은 대체로 겹쳤다. 간혹 예상이 다를 때 내기를 했다. 수상자 발표는 매번 조마조마했다. 대상이 아닌 상들의 수상자들도 요즘처럼 기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격했다. 우는 것이 흔했다. 그들의 눈물에 식구들은 공감했다. 잘했다거나 탈 만했다거나 누구는 아쉽게 됐다는 뒷말이 덧붙여졌다.


최우수상 발표 직전에 치킨이나 족발을 시켰다. 대상 발표할 즘이면 음식이 도착했다. 우리는 고스톱을 잠깐 멈추고 연말 만찬을 나누며 대상 발표를 지켜봤다. 대상 수상자는 대체로 울었던 것 같다. ‘무려’ KBS, MBC, SBS가 인정한 최고였기에, 영광은 눈물로 육화될 만했다. 영광의 열기는 안방까지 전해져 우리의 1년도 감격스럽게 마무리되었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정서적 맥락에서 개별 감격은 배가 되었다. 치킨이든 족발이든 다 맛있어서 배가 된 감격도 맛있고, 포만했다. 


TV가 한 대 더 생기면서, 서로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케이블과 종편이 생기면서, 유튜브가 보편화 되면서, 우리는 공유하는 문화콘텐츠를 잃어갔다. 엄마는 [미운 우리 새끼]를 좋아했고, 나는 관찰형 예능을 보지 않았고, 동생은 개 관련 유튜브를 팠다. 우리는 더 이상 연말시상식을 보지 않았다. 대중문화가 구심점이 되는 관계는 허술하겠지만, 구심점에 대중문화 한 조각도 없는 관계는 심심하다. 우리는 연말에 모이지도 않았다. 확실히, 할 말이 줄어들었다.


다양성, 좋다. 나는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와 공유되지 못하는 다양성은 파편화일 뿐이다. 우리는 각자가 응원하는 누군가가 있을 뿐, 타인이 무엇을 왜 응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연대는 없고 개별의 동어반복만 있다. 팬덤은 내부에 자기복제가 그득하다. 자기복제로 쌓아 올린 자존심은 ‘네가 뭔데 날 판단해?’라며 마음껏 오만했다. ‘나’에 어떤 타자도 들이지 않았다. 소소한 비판에 싸움닭처럼 날 세우는 것은 허약한 자존감을 드러낼 뿐이다.


팬덤은 권위 없는 권력으로 변질되었다.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권위를 무조건적 배척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권위 그 자체는 자연발생적인 카리스마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권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은메달이 김연아를 딸 수 있었던 것도 올림픽보다 김연아의 업적이 더 권위적이기 때문이었다. 김연아를 응원했듯 영광을 중심으로 공동체는 응집한다. 탈주술화 된 시대에도 신의 영광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을 보면, 권위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김연아가 은메달을 딴 게 아니라 은메달이 김연아를 수상


반면 팬덤은 다수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시상식에서 다수는 곧 힘이자 타자의 공감과 무관한 절대 권력이다. 중국이 막대한 내수시장으로 힘을 과시하는 것처럼 팬덤은 방송, 광고주, 다른 팬덤 집단에 위력을 행사한다. 팬덤의 인정은 인기일 뿐, 어떤 권위도 없다. BTS의 인기는 아미에서 비롯되지만 권위는 아미가 아니라 빌보드 1위에서 비롯되었다. 코로나 사태 때 일부 종교는 권위를 잃었다. 그러나 아직도 다수여서 권력이 남았다.


권위 없는 권력은 꼴 보기 싫다.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 많아지고, 내가 신뢰할 만한 권위는 사라졌다.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 팬덤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침략해 들어올 때, 나는 무방비여서 더 짜증난다. 엄마는 임영웅을 좋아하지만 나는 미스터트롯 출신이 광고하는 제품을 불매 중이다. 그들은 내가 보는 예능에 출연해서 웃기지는 않고 노래를 불러댔다. 그것도 2주 특집으로.


‘도란도란’의 시절이었다면 그들을 응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림없는 소리. 지금의 내가 그들과 화해할 일은 없다. 경계심이 서로를 밀어내며 우리는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 자유로운 것과 표류하는 것의 구분이 애매해진다. 생각은 엉뚱한 대로 흐른다. 다양성 속에 숨어 있을 무수한 쓸쓸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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