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아침의 스타벅스 2층, 시시한 인생 소모임 중이다.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시간에 단정하게들 여기 있나? 일요일 알바생은 바뀌어 있고, 손님이라고는 나와 남학생 둘이 전부다. 먹을 거 다 먹고 끄적대는 9시 30분, 우리는 2층 모서리에 직각 삼각형 위치에 앉아 각자 할 일 중이다. 학생들은 아마 나처럼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일 것이고, 나는 무엇이 되지 않으려고 굳이. 아니, 이럴 수밖에.
“쌤은 뽀뽀해 봤어요?”
열네 살짜리 여학생이 농락해 왔다.
“그럴 리가?”
이젠 무저항으로 응수했다. 그 학생은 멘토스 은박 껍데기로 하트를 접어줬다. 군인들이 초코파이 봉지로 딱지 모양을 접는 것 같은 의미 없는 손놀림이었다. 하트에 눈이 꽂힌 남학생이 조롱을 더했다.
“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하트도 받고 좋으시겠네요?”
“좋아 죽-겠다.”
“와, 저도 서른 살쯤에는 이런 거 받을 수 있겠죠?”
“그럴 거 같지? 내가 몇 살이게?”
“!!!”
여학생은 그때야 본인이 접은 게 하트 모양이라는 게 신경 쓰였는지 회수해 갔다. 크리스마스이브 마지막 수업이었다.
퇴근길에 메리 크리스마스가 지천이었다. 지하철에도, 대학로 번화가에도, 크리스마스는 빛으로, 소리로 메리메리했다. 이날 하루쯤은 길고양이도 메리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술집을 지나 원룸단지로 들어서자 평범한 밤이 되었다. 땡땡 얼어붙은 어둠 속을 걸어 들어갔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불 켜진 방이 적은 듯했다. 밤늦게까지 등대처럼 간판을 켜두던 베트남 쌀국수집도 불이 꺼져 있었다. 집 근처 국밥집에 갔다. 장년에서 노년에 걸친 아저씨들이 듬성듬성 불콰했다. 가장 어린 나는 조용히 콩나물국밥을 먹고 집에 들어왔다.
별일 없었다. 밥벌이에 잔뜩 충실했다는 보상 심리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억지로 「지긋지긋한 실패를 끝내는 방법」을 퇴고하다가 ‘춥다’로 얼버무리며 자리에 누웠다. 불 꺼진 방, 배 위에 노트북을 올려둔 채 『도신2』(1994)를 봤다. 내 일상에 수도 없이 반복되었을 풍경이었다. 유재석, 강마에, 이도, 김신, 장그래, 토니 스타크가 그렇게 내게 누벼졌었다. 과거만 누덕누덕 기운 거적때기 같은 밤을 또 몇 번이나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도신2』는 네 번째든가 다섯 번째든가, 횟수를 잊었다.
11시가 안 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잠이 쏟아졌다. 수면제 처방 9~10개월 되려나, 귀한 기회였다. 노트북을 덮고 눈을 감았다. 잠들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단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비몽사몽 중에 요즘 약발이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약간의 꿈을 꿨고, 또 눈을 떴을 때야 약을 먹지 않은 것을 알았다. 3시 25분, 잠이 달아났다. 약 없이 네 시간 남짓 잔 것에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며 다시 잠들기를 포기했다.
이불 밖은 추워서 일어날 생각만 만지작대며 20여 분을 뒹굴었다. 그야말로 고요한 밤이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로 고요의 크기가 내 방만큼 좁아졌다. 거룩할래야 거룩할 수 없는 방구석에서 아기가 아니어서 잘 못 잔 것인지, 이만하면 잘 잔 것인지를 다시 산술하다가 내게 구주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다음 주에는 주주배정 받은 신주 인수권을 매도하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광’도 써야겠는데, 도무지 접점이 없으니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3시 50여 분, 초고 쓰는 지금은 11시, 남자 멤버 3명 그대로다. 서태지가 1년 만에 근황을 전한 김에 난 서태지 할 테고, 나머지 학생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나면, V-stop, 난 알아요, 그런 기분이다. 오늘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너희들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을 테다. 너희를 볼 때마다 내겐 가슴 떨리는 그 느낌이 있었다. 이렇게 될 지는 몰랐다, 이 나이에. 이제 됐고, 그걸로 족해도,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 딱히 집에 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면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다 보면 이상해씨는 귀엽다. 잠이 쏟아진 탓이다. 오늘, 버티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새벽 4시에 찐고구마와 우유를 먹고, 「지긋지긋한 실패를 끝내는 방법」을 퇴고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뒷일을 제4의아해에게 넘긴 후, 『보물섬』으로 수업 자료를 만들었다. 캐리비안의 해적이 이 책에서 나온 걸 이제야 아는 무심함 뒤로 어둠이 가셔 있었다. 아침으로 라면을 끓였다. 남은 콩나물을 다 넣었다. 곰팡이가 펴서 물에 씻었다가 볶아서 다시 보관한 김치에 또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곰팡이가 없는 부분의 김치 몇 점을 냄비에 넣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 이제 냉장실에 남은 반찬은 없었다. 『재벌집 막내아들』15화를 보며 라면을 먹고, 성애 낀 화장실에서 샤워했다. 진도준의 ‘나를 죽인 것은 결국 나였다’의 여운이 꽤 흡족했다.
저녁에 학부모 상담이 예정되어 있어서 잘 입지 않는 니트를 입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단순히 갖고 싶다는 이유로 산 옷이었다. 보기 좋았으나 가슬가슬한 털이 불편했다. 간편한 스타벅스에서 「갑으로 살아가는 을」을 쓰려다가 3인의 사내가 우스워 계획을 틀고 졸아가며 이 글 위에 있다. 그리고 이제 자리를 뜰 때가 되었다. 장년의 아저씨, 아줌마 무리가 와서 시끄럽다. 커피 종류, 혈액암, 군대 간 아들 이야기로 날뛰는 그들의 속사정을 내가 알게 되는 사태가 지끈지끈하다. 그러니까 V-stop, 내가 원하는 건 긴긴 고요다.
두 달 전, 조카들에게 디즈니 멜로디 장식을 보냈었다. 디즈니 동화가 실물로 튀어나와 불빛과 함께 캐롤을 흘리는 가히 ‘메리메리메리’한 장난감이었다. 사실은 35년 전 내게 보낸 장난감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런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 없었고, 매리는 한 번이면 충분한데,
“쌤은 오늘 뭐 해요?”
“약속도 없으니까 울다가 자야지.”
“저는 가족들이랑 맛있는 거 먹을 건데!”
나도 먹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콩나물국밥. 무려, 울지 않았다. 아니, 울 걸 그랬나. 선물을 받지 못한 명분이라도 있게. 크리스마스 당일 퇴근길에도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단, 공원 정자에서 침낭에 몸을 웅크려 자고 있던 노숙자를 그냥 지나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날 밤 최저 기온은 영하 6도였고, 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