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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06. 2023

엄마의  비가성비 밀키트

내게 ‘집’은 엄마다. 이곳에 엄마가 없어서 나는 ‘방’에 살고 있다. 엄마는 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 안방에서 택배로 내 밥상을 챙긴다. 내 밥상은 당신이 먹여 키운 시간의 자기 증명이자 권리다.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어차피 엄마 손맛보다 나은 내 입맛은 없다. 나는 엄마가 없는 방에서 ‘집밥’을 먹는다.


아니, 자취가 오래 되다 보면 ‘방밥’을 먹게 된다. 내 밥상은 엄마와 공장의 전장이다. 공장은 첨단 음식 과학으로 무장해 침투해왔다. 엄마는 맨손으로 고군분투했지만 1인 가구 자식들은 대체로 공장 편이다. 방에서 먹는 밥들은 귀찮았지만, 자식을 키운 손맛은 귀찮은 적 없었기에 엄마는 간편함에 대한 수요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비자 반응에 민감한 시장은 밥상에서 벌어지는 엄마들의 종말을 제대로 읽고 점점 편리해졌다.


밥상의 핵심, 김치도 엄마들 손을 떠나가는 중이다. 이제 ‘너네 집 김치 맛없다.’가 엄마 모독이 되지 못한다. 간장, 된장, 고추장이 상품이 된 것과 같은 수순으로 김치가 굳이 엄마일 필요를 잃었다.


“김치 있나?”

우리 엄마는 내 김치가 굳이 당신이어야 했다. 엄마의 걱정이 미안했다. 수십 년 노하우를 축적한 상품화 된 김치도 충분히 맛있었다. 내 입에 엄마 김치가 가장 맛있지만, 내 만족의 장벽은 낮은 편이어서 굳이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택배비 포함하면 엄마가 김치에 판 손품은 최저임금 절반도 나오지 않을 듯했다. 엄마가 김치를 보내오는 비시장적 사태가 탐탁지 않았다.


늙은 어미가 늙어가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비효율적 노동밖에 남지 않았기에 밥상은 모성이 현현할 수 있는 최후 영역이었다. 최후의 전장에서 엄마가 쏟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밥상에서만큼은 정성이 기업이 구축한 과학 문명을 초월하지만 나는, 귀찮았다.


2022년, 내 밥상은 귀찮음의 극의에 닿았다. 젓가락질도 성가셔 김치도 끊었다. 밥할 때 쌀 두세 숟갈 대신 버섯이나 시래기를 넣었다. 취사가 완료되면 버섯밥, 혹은 시래기밥에 양념간장을 비벼 한 끼 때웠다. 간이 맞았으므로 어떤 밑반찬도 필요 없었다. 18kg 감량하는 동안 냉장고에 있던 김치에 흰곰팡이가 폈고, 곰팡이를 씻어 낸 김치를 볶아서 다시 보관한 것도 흰곰팡이가 내렸다. 깻잎 무침 표면은 맥주거품처럼 보글보글해졌다. 모두 버렸다. 죄책감을 엄마에게 풀었다.


“엄마, 좀! 아들 김치 안 먹는다고.”

나는 냉장고에 가득한 여백이 편안했다. 필요한 채소는 그때그때 마트 냉장고에서 가져왔다. 내 방밥에 남은 엄마는 매끼 반 숟갈 양념간장뿐이었다. 양념간장은 1년은 너끈히 먹을 만큼 있었다. 내 밥상에 엄마가 새롭게 들 자리는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당신 이름이 아니라 내 어미로 살아온 세월이 시무룩해졌다.


“사는 건 안 귀찮나?”
 내 원산지에게, 사는(buy) 건 간단하지만 사는(live) 건 귀찮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아들 먹일 거 연구 좀 하소. 머리 장식품이요?”


엄마는 내 귀찮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신 손 떠나 산 세월이 20년 넘은 아들의 제대로 먹기를 포기했다. 주로 집에서 끼니를 이어온 엄마의 세월은 끼니를 ‘밥-국-김치가 포함된 반찬’의 든든함으로 규정했지만, 밖에서 끼니 해결이 잦은 나의 세월은 끼니를 방밥과 외식으로 이분했다. 엄마에게 집밥인 내 방밥은 부실해야 했다. 외식과 배달 음식으로 과잉될 칼로리를 상쇄하는 중용이 필요했다.


“시래기 보내 줄 게.”

“여기서 사도 돼요.”

“그래도 다르다.”


아니, 왜 또 가성비 떨어지는 손품을, 어라, 과연, 달랐다. 이곳 포장된 시래기는 질겼다. 엄마 말에 따르면 한 번 삶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그 수고를 들일 것 같으면 애초에 젓가락을 썼다. 밥 천천히 씹어 먹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합리화해도 별로는 별로였다. 밥상의 주류가 버섯밥으로 기울어져 갔다. 버섯은 헹구지 않은 채 안친 쌀 위에 쭉쭉 찢어 넣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버섯도 농약 쳐서 키운다는 걸 알았지 당시에는 버섯은 농약 안 치는 줄 알았다. 엄마의 시래기가 안 헹궈졌을 리 없었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밥할 때 깡깡 언 시래기 덩이를 넣으면 그뿐이었다. 게다가 냉이가 섞여 풍미를 더해졌고, 된장으로 약하게 간이 되어 있어 양념간장 뜨는 수고까지 덜었다. 밥을 퍼서 그것만 슥슥 비벼 먹어도 되는 초간편 시래기는 무려, 부드럽기까지 했다.


“우리 엄마 천재네. 아들 완벽히 이해하셨어.”


칭찬은 고래를 지나치게 춤추게 했다. 엄마는 최저 노동으로 건강 최소 영양을 지키는 가성비 밥상에서 당신의 새로운 자리를 찾으셨다. 대량생산으로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는 공장이 하지 않을 수고로움을 자처했다. 이 글에 ‘귀찮’만 열한 번 쓴 내게 꼭 맞는 필요였다.


“시래기 있나?”


나는 엄마가 보관 중인 시래기와 동네 밭에서 구할 수 있는 시래기를 모두 먹었다. 엄마는 시래기와 별개로 버섯을 말렸고, 나는 또 여기서 사도 되는 것에 굳이 손품 팔지 마시라 말렸다. 그러나 엄마에게 효율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통유리로 된 남향 베란다와 당신의 부지런함만으로 내 입에 들어갈 결과의 품질을 높였다. 베란다는 키우고 있는 사모예드 화장실도 겸해야 했기에 엄마는 볕과 위생 사이에서 아슬아슬했음은 짐작할 만했다.


설에 엄마가 수확한 햇살의 알갱이들을 확인했다. 말린 버섯만 7L는 됨 직했다. 햇볕에 버섯향이 날아갔지만 당신의 자부심 같은 햇살향이 포실했다. 엄마가 아니라면 내가 표고를 살 일도 없었다. 가성비 세계에서는 느타리나 팽이도 충분했다. 엄마는 마트에서 떨이 나온 것을 모아 말린 거니 군소리 말고 먹으라 했다. 늙은 호박과 다시마도 말렸다고 자랑했다. 늙은 호박은 누가 줬고, 다시마는 어떻게 구해서 어떻게 말렸는지 신나게 부연되었다. 내가 먹을 것들의 중량은 저 사연들을 껴입고 있어 든든하지 않기 힘들겠거니 했다. 다만, 밥할 때마다 저것들을 일일이 넣으라니, 번거로울 것을 예감했다.



“이래 주면 니 또 하나씩만 먹을 거 아니가?”

“역시, 우리 엄마 천잰데.”


엄마는 된장으로 약하게 간 한 시래기와 냉이, 다시마, 채 썬 호박을 한 데 섞었다. 그것을 2인분으로 소포장 했고, 그 위에 플레이크처럼 말린 버섯을 뿌렸다. 아니 쌓았다. 엄마의 슈퍼 밀키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호박 가루와 죽순 가루는 사은품처럼 딸려 왔다. 시리얼 먹을 때 우유에 타 먹는 중이다.


엄마의 밀키트는 최고의 다이어트 식품이었다. 다이어트 주적은 허기였고, 밥 두세 숟갈의 공백을 식이섬유와 부속 영양분으로 그득 채워 450칼로리 안팎의 끼니가 튼튼해졌다. 대기업이 침투해 올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는 같은 값이면 단백질 들어가는 제품을 택하니 엄마의 밀키트는 아주 오래될 엄마 고유 영역일 것이다. 손품의 효율을 무시할 수 있는 엄마의 미련함 덕분에, 나는 마음껏 귀찮음을 귀찮은 것으로 내버려 둔다.


“시래기 다 무긋다.”

인사 대신 다짜고짜 말했다. 내 한 마디에 엄마는 ‘산책 갈까?’를 들은 사모예드처럼 목소리가 환해졌다. 돌아오는 월요일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날, 마침 엄마 생신이었다.


찾아뵙지는 않는다. 왔다 갔다, 귀찮다. 용돈으로 때웠다. 뻔뻔하게도, 나를 보살핀 것으로, 당신의 태어남이 의미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을 당신이 아니라 나의 엄마로만 규정하는 이기적 발상이지만 당신이 오래도록 내 엄마이길 바란다. 가성비가 너무 좋아서 나는 충성 소비자다. 내 영원한 단골집에 압도적 감사를.


3월 7일 배송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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