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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an 10. 2023

먹은 것들의 자백

2022년 외식 결산

2023년 첫 똥을 기억한다. 1월 1일 오전, 영역 표시하듯, 스타벅스에서였다. 변기에 앉는 순간 이얍, 일필휘지, 끝. 이만하면 1등급 똥싸개다. 내 몸에 남은 2022년은 거의 없었다. 물 내려가는 소리를 2022년이 끝나는 인사로 규정할지, 비명으로 규정할지를 잠깐 고민했다. 뭐가 되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똥 만드는 시간 하나를 처분했고, 또 새로운 똥을 만들어 갈 것이 자명했다. 똥을 싸다 보니 저 얼굴이 되었군, 하며 손을 씻었다. ‘똥. 덩. 어. 리.’ 강마에도 이제 나보다 어리려나, 하며 화장실을 나왔다.


바닥에 자작자작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또한 똥오줌으로 사라질 것이었다.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며 사라질 것을 반복하며 살아질 우울은 별일 아니었다. 무의미에 무뎌졌다. 오히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똥의 구성성분 구분은 무의미해서 분배 정의가 실현된 위로가 되었다. 500원짜리 똥을 싸도, 5,000,000원짜리 똥이 부럽지 않았다. 그렇다면 먹는 일은 다 뭔가, 배설 직후의 현자의 시간 문득, 한 해 뭘 얼마나 먹었는지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이날 밤, 가계부를 기반으로 외식 메뉴를 간추렸다. 내 식문화의 최빈값 집밥은 똥에 가장 가까운 영양섭취 방법으로서 내 식문화 평균값을 갉아 먹었지만, 외식은 똥에서 가장 먼 질서의 극단값으로서 내 식문화 평균값을 올려줬다. 1월에 ‘식사’ 1개, ‘점심’ 7개로 기록된 것은 메뉴를 특정할 수 없지만, 2월부터는 메뉴를 기록하고 있어 통계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가장 많이 간 식당은 편의점이었다. 도시락 13개, (삼각)김밥 30개, 샌드위치 46개를 먹었다. 1월의 ‘점심’ 평균 단가가 5900원이 안 되었으니 7개 중 절반 이상은 편의점이었을 것이다. 김밥 30개에는 반드시 컵라면이 붙었다. 공부방에 컵라면을 쌓아 놓고 수업 사이를 때웠다. 컵누들 39개, 쇠고기미역국라면 24개, 신라면 건면 16개는 김밥과 함께 할 때는 끼니였고, 단독으로 먹을 때는 새참이었다. 쇠고기미역국밥 12개는 미약한 끼니였다. 미역국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인스턴트 제품 섭취의 죄책감을 미역의 혈관 건강 기능으로 갈음했다. 1년 1,095끼 중 1,000의 꽁다리는 편의점 근처에서 처치된 셈이었다. 나머지 중 110개는 집에서 라면으로 지웠다. 건면으로 먹되, 무, 파, 양파, 버섯, 시금치, 콩나물 등 무작위로 채소를 넣었고, 나트륨을 감안해 김치는 먹지 않았다.


편의점이 런치플레이션의 피난처만은 아니었다. 공부방 인근 편의점 맞은편에는 가성비 극강의 함바집이 있었지만 공부방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나가기 귀찮아서 출근할 때 먹을 걸 사들고 갈 뿐이었다. 그리고 샌드위치 중 30개는 학교에 출근하며 먹은 아침이었다. 9시 수업이면 러시아워를 피해 8시에 맞춰 도착해 가볍게 12시 점심을 예비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외식 주 구성성분이 편의점이고 보니 몸이 객관적으로 싸구려가 된 것 같았다.


그나마 학교 교직원센터 밥이 55회쯤 되는 것이 위안이었다. 교직원센터에서 먹은 끼니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점심으로 1학기 15회 2학기 30회를 먹었고, 스케줄 따라 간간히 저녁도 먹었으니 어림값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단백질 기반 메인 반찬에 채소류 서브 반찬, 무엇보다 따뜻한 국은 내 몸에 가장 온전한 기본 식사였다. 다른 강사들은 이런저런 불평을 내놓았지만, 사료에 수렴해 가는 집밥을 먹는 내게는 성찬이었다. 성찬 메뉴를 정확하게 모르는 점도 좋았다. 불확실한 기대는 희망을 닮았다. 알 수 없는 맛있음에 대한 설렘은 매일 아침 출근 스트레스를 일정 부분 상쇄했다.


파리바게트 샌드위치(혹은 샐러드)는 30개 먹었다. 요기요에서 11,000원을 넘겨야 할인 받을 수 있으므로 매번 2개씩 주문했다. 주로 공부방 가는 길에 샀고, SPC 사태 후 손절했다. 본사에 별일만 없었다면 내 외식의 최빈값이 편의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 식문화 경제학에서 ‘제과점 빵’은 부자의 최저 기준이므로 싸구려의 기분을 뭉갤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나머지 6개 메뉴는 고만고만했다. 잔치국수와 복국은 18그릇씩 먹었다. 잔치국수는 연중 꾸준했고, 복국은 모두 10월 이후에 먹은 것이었다. 콩나물국밥은 연초에 집중했다가 12월 들어 부활해서 14그릇을 먹었다. 베트남쌀국수는 가을 무렵부터 퇴근길 마침표로 작동하며 13그릇을 먹었다. 함바집은 양 조절을 못해서 13번만 갔다. 물회는 늦봄부터 여름까지 11그릇 먹었다. 글이 될 정도로 일상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메뉴들이 예상보다 적어서 의외였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음식 값 적절성 기준인 짬뽕은 6그릇밖에 안 먹은 것이었다. 3번은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인 1월에 동네 맛집에서 브런치로 먹었다. 연말에 ‘이 봐, 나 올해 18kg 감량해서 널 만날 자격을 갖췄어!’라며 금의환향하려고 다시 찾았는데, 마라탕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줄 서 먹던 짬뽕집이 왜 폐점했는지 의아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마라탕에 단단히 삐쳤다. 조만간 첫 대면하려 한 마라탕을 유예했다. 나머지 3번은 자전거로 약 24km 거리에 있는 중국집에서 먹었다. 왕복 자전거 48km를 타게 만들려면 그 정도 미끼는 필요했다. 다음 짬뽕은 올해 낮 최고 기온 10도를 넘어가며 바람이 3m/s 이하인 어느 날, 24km를 달려 맛볼 것이다.


그 외 칼국수 4회, 순두부찌개 3회, 이슬람 소고기국수 3회였고, 기타 10개 메뉴는 2회 이하로 먹었다. 혼자 먹었다.


엥겔지수가 21년 만에 최고치 13.3%를 찍었다는 2021년 7월 뉴스 기사가 가소로웠다. 식비로 1분기 평균 210,150원, 2분기 237,660원, 3분기 239,200원을 썼다. 치킨 값이 준 대신 채소 값이 들어서 평년과 비슷했다. 교직원센터 점심값 2,500원인가 3,000원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니 보정 수치는 월 1만 원은 넘겠지만, 2만 원은 넘지 않았다. 내가 왜 이 따위로 먹고 살아야 하는가, 에라, 반항해서 4분기에는 복국을 주축으로 평균 340,130원까지 늘렸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 봤자 똥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분명 그날그날의 생기였다. 일상의 대부분은 연봉의 법칙이 적용되어 있으므로 ‘내가 선택한 맛있는 시간’은 숫자에 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루에 맛있는 30분을 가질 것이라는 설렘과 설렘을 실현한 충족감의 경험이 내일을 기대케 했다. 11월 중노동의 달을 복국으로 버텼다. 그러나 즉각적 쾌락은 그날의 이름이 되기에 역부족이었다. ‘잘 먹고 죽어 떼깔 좋은 귀신’이 되고자 했지만, 성향은 극복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오늘의 이름’이었다. 오늘의 이름은 어제의 이름이 되어 똥으로 빠져나갔으므로 편의점이든 복국이든, 지금의 나와 무관했다. 꽃이 되지 못한 몸짓의 날들은 기억의 영양실조로 우울감을 살찌웠다. 나는 여전히 별 거 아니었다.


누구와 밥을 먹었는가는 그 하루가 상대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방법이 아닌가 싶었다. 사람과 먹은 밥이 모두 의미 있지 않지만, 기억의 농도를 높였다. 2022년, 사람과 먹은 끼니는 26회였다. 연초에 김과 2박3일 전주에 다녀오며 8끼가 추가되어 평년보다 조금 많은 편이었다. 명절에 식구들과 8끼를 먹었고, 나머지는 지인들과 먹었다. 그나마 먼저 밥 먹자고 해줘서 먹은 끼니들이었다. 좋든 싫든 이 기억들은 시간의 변기로 흘러내려 가지 않았다. 크고 단단한 기억으로 남아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가 살아있다는 명백한 증거로 기능했다.


내향성의 탈을 쓴 회피형 인간은 자해에 익숙하다. 자기방어를 위한 회피라지만, 회피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먹는다. 자기 과식으로 인생이 체한다. 하지만 답을 알았으니, 아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다가 인정했으니, 시작은 해야겠다. 매월 1회 정도는 먼저 밥 먹자고……는, 힘들 것 같고, 분기당 1회라도. 조금 더 연결된 혼자되기



~는 개뿔. 최종 퇴고 전까지는 이렇게 썼다가 급하게 결론을 바꾼다. ‘밥 먹자’는 역시 귀찮다. 그냥 맛있는 것을 ‘먹일 것이다’. 아직 ‘먹을 것이다’고 쓰지 못하지만, 아무튼 먹는 건 먹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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