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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n 19. 2023

4천원짜리 짜장면, 2023년

롯데리아에 알바 갔다가 ‘안녕하세요, 롯데리아입니다.’를 말하기 민망해 하루 만에 그만 둔 적 있었고, 과외는 해 본 적 없는 데다 낯도 많이 가려 시작할 엄두가 안 났고, 저체중에서 막 벗어났을 때라 막노동 할 몸도 아니었다. 내가 할 만한 일 중에 많이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중국집 배달 일이었다.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은 없으나 자전거를 탈 줄 아니 어떻게든 되겠거니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2005년, 짜장면은 3,000원이었다. 월 2회 휴무에 첫 달 100만 원, 그 다음 달부터 105만 원 받았다. 일당으로 치면 평일 30,000원, 주말 35,000원이었다. 최저임금 2,840원이었으니, 하루 11시간 일하는 평일에는 최저임금도 못 받는 셈이었다. 배달한 그릇들을 찾으러 가야 했기에, 짜장면 배달 한 그릇만 할 때의 내 인건비에 인간의 존엄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3,000원에 포함된 노동력의 출처를 상상하지 못하는 무심함에게 그릇을 무성의하게 놓는 것으로 소소하게 복수했다.


헬멧을 쓰지 않았다가 두 번인가 세 번 걸려 25,000원씩 냈고, 역주행으로 50,000원을 냈다. 모자도 답답한 내게 헬멧은 족쇄였다. 다른 배달원들과 경찰 단속 정보를 공유하며 가능하면 헬멧을 쓰지 않았다. 헬멧을 쓰지 않을 자유를 국가가 과잉 간섭한다며 분을 토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그러나 역주행은 아직도 억울하다. ‘역주행’이 주는 어감이 난폭하지만, 내 역주행은 불법 주차된 차들로 죽은 1차선을 타고 슬금슬금 한 블록 돌아가는 20여 미터 구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 길은 시설이 수습하지 못하는 질서를 보조하는 이 동네 암묵적 샛길이었다. 내가 딱지를 끊는 동안 다른 오토바이들이 유유히 역주행으로 지나다녔다. 딱지를 떼인 직후, 화장실에서 철가방을 내동댕이치고 좀 울었다. 나는 1.5일 남짓 쓸모없는 존재였다.


소소한 신호위반은 했지만, 속력 위반은 못했다. 기본적으로 차가 무서웠다. 지금도 차를 운전하지 않는 이유가 사람이 없는 횡단보도 신호를 지킬 의사가 없고, 다른 차가 무섭기 때문이다. 무서운 만큼 조심했지만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마감이 지났는데도 탕수육이라서 사장은 주문을 받았다. 나는 시급제가 아니었으므로 근로 시간 이후의 배달은 ‘인간적으로’ 내 몫이었다. 비 오는 밤, 아파트 중앙도로 옆에서 끼어든 차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다가 미끄러지며 굴렀다. 비가 와서 미끄러졌지만, 비가 와서 헬멧을 쓰고 있었다. 팔꿈치, 배, 무릎에 찰과상만 입었다. 과실은 상대 쪽에서 질 일이었지만, 피와 약값은 내 몫이었다. 탕수육 값을 물어내지 않아도 되어 안도했다.


배달 아르바이트가 내게 남긴 것은 ‘공부 안 하면 큰일 난다.’였다. 아스팔트 위에 쏟긴 탕수육과 짬뽕이 비에 씻겨 가는 걸 바닥에서 수평으로 본 그 밤, 빗물이 차가웠다. 피는 빗물에 희석되었다. 모텔에서 속옷만 입은 손님을 맞는 것도 싫었고, 단란주점 여종업원 대기실에서 투명인간 취급 받는 것도 찜찜했다. 병역까지 치른 마당에 초면에 반말 듣는 것도 불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OO원입니다.’였으니 나는 천했다.


무언가의 귀천은 발언권에 있다. 내가 나임을 발언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아니다. 흑인이 그랬고, 여성이 그랬고, 조센징이 그랬다. 아직도 사회 소수자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시장 사회에서 개체의 발언권은 가격이다. 공기, 물, 쌀이 그렇듯, 개체 본연의 사용가치는 시장 구조가 만든 교환가치를 이길 수 없다. 가치의 최종 편집권은 구조가 가진다. 짜장면은 자신 만큼의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천해졌다.


2023년 우리 동네 중국집A 짜장면은 4,000원이다. 18년 전 최저임금 한 시간으로 한 그릇을 못 사 먹었지만, 최저임금 9620원 세계에서는 두 그릇을 사 먹고도 저가 커피 하나 사 먹을 돈이 남았다. 이 가게 짬뽕이 7,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미끼 상품으로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 가게에서도 짜장면은 6-7천 원쯤 하니 짜장면이 최저임금에 역전 당한 건 사실이다. 4,000원, 소비자로서는 반갑지만, 최저임금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이면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짜장면은, 18년 전 짜장면 배달 한 그릇 가는 내 기분을 하고 있을 듯했다.



두 블록 근처 중국집B에서도 같은 가격에 팔았지만 그곳에는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내가 먹은 것은 ‘딱 그만큼의 인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3,500원이었다. 3,500원짜리 짜장면은 주머니가 아쉬울 때 가장 만만하고 맛있는 한 끼가 되었다. 맛의 하한선을 높여 줌으로써 최저비용을 지불하고서도 소비자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 짜장면 양념에 고기가 없었고, 야채도 빈약했다. 짜장면이라기보다는 양파가 들어간 춘장볶음면에 가까웠다. 유사 짜장면을 먹고 있으므로 나는 유사 인간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이거라도 먹으라며 동냥 받는 기분, 먹고 떨어졌다.


중국집A의 짜장면은 달랐다. 18년 전과 다를 게 뭔가 싶을 정도로 정석적이었다. 양이 특별히 준 것도 아니었다. 건너편 순대국밥이 6,000원에서 8,000원으로 몸값을 올리는 동안 500원 겨우 올린 4,000원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짜장면을 먹는 동안 4,000원밖에 소비하지 못하는 내 존엄성이 다른 손님보다 열등하지 않았다. 짜장면이 사람이라면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귀하다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4,000원 덕분에 런치플레이션 시대에 존엄성을 지켰을 거라고.


밥 먹을 때마다 ‘나’가 헐값임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물가는 존엄하고, 월급은 하대 당했다. 자영업자든 노동자든 대체로 대체 가능하기에 ‘꼬우면 때려치우든가?’에 할 말이 없다. 말대꾸 하는 순간 밥그릇이 위태로워짐을 직감하며 발언을 포기한다. 노동을 팔아 밥 벌어 먹는 게 아니라 자존감을 팔아 밥 벌어 먹는 것이다. 상황이 반전 되지는 않을 것이다. AI의 보편화로 일자리는 더 줄어들 것이고, 기후위기로 농작물 가격은 더 오를 것이고, 이로 인한 크고 작은 전쟁으로 원자재 값도 오를 것이다. 어떻게든 될 일이 아니므로 용기를 내면 곤란하다. 할 수 있을 때, 돈을 벌며 짜장면의 세계를 예비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자비는 없다.


물론 4,000원은 현금이므로 세금 관련 산수와 도덕에 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 식당의 그저 그런 끼니도 5,000원이 넘어가는 시대에 현금가 4,000원짜리 짜장면이면, 판매자와 소비자의 암묵적 룰을 넘어서서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는 보편 복지다. 그 무엇도 런치플레이션을 역주행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부담 없이 괜찮은 끼니를 먹어도 된다며 내밀어주는 맛있는 손, 안녕하세요, 짜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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