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Mar 13. 2023

봄동 겉절이 - 입 안에 봄이 피다

겨울을 견딘 대지의 초록빛 기지개, 봄동이다. 봄동은 웅크려 열을 가두는 과학을 무시하고 옆으로 잎사귀를 활짝 펼쳤다. 봄동의 과학은 알 수 없으나 봄동의 무모함이야말로 속이 꽉 찬 ‘기투’임이 납득되었다. 세상에 ‘피투’된 모든 존재는 ‘나’를 향해 나아가야 했고, 봄동은 겨울의 끝에서 가장 먼저 초록이었다. 그러나 질긴 생명력으로 성취된 봄에게 영광은 돌아가지 않았다.


발음처럼 똥 됐다. [봄]의 여음에 더해진 된소리는 아기똥아기똥 된소리를 버티며 겨우내 묵음이었다가 정작 봄일 때 별똥처럼 사위었다. 개똥 같은 일이다. 뻔쩍뻔쩍 솟은 건축물들의 그늘에 쫓겨난 철거민의 지난함과 산업재해 사망자의 허망함이 합법적으로 묻히듯 목련의 뽀송뽀송함과 개나리의 따스함 뒤로 봄동은 잊혔다. 새 학기 활기찬 어수선함이 정돈될 무렵 벚꽃이 봄바람에 휘달리면, 봄동은 겨울을 버텨 열어젖힌 봄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겼다.


못생긴 싸구려 풀떼기는 겉절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봄의 영광을 되찾았다. 봄동 겉절이는 입 안에서 아삭하게 누구보다 싱그러운 봄이었다. 2008년 2월 <1박2일> 전남 영광 편 강호동의 먹방 이후, 봄동 겉절이에 대한 모든 찬사는 그 장면의 각주에 불과해졌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강호동의 예능 호들갑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고기보다 맛있을 수 있다고 과장해야, 봄동 겉절이를 먹어보지 않거나 봄동 겉절이를 대충 넘긴 사람들에게 봄동의 진의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봄동은 오직 겉절이어야 했다.


작년 봄, 내 돈 주고 처음으로 봄동을 샀었다. 채소는 섭취해야겠고, 봄동은 최소 포장 단위가 시금치보다 넉넉한데도 더 쌌다. 시래기나 버섯 대신 밥에 넣을 생각이었다. 쌀밥과 배추는 김치로 증명된 궁합이므로 봄동과 밥의 궁합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겨울의 중심에서 봄이 잉태되는 모순은 조화롭지만, 밥 안에서 무르게 서걱거리는 모순은 양념간장으로도 수습되지 않았다.


남은 봄동 처리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동서양 모든 식재료를 아우르는 관용의 왕, 라면이 있었다. 김치라면도 팔리는 마당에 라면이 봄동을 소화 못할 리가, 있었다. 뭐지? 밥에서 느껴진 이질감이 반복되었다. 겉은 무르고 속은 서걱한 모순이 ‘겉바속촉’의 법칙에 위배되어선가 했다. 치킨도 아니고 라면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당황스럽기보다는 현대 음식 과학 정점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 흥미로웠다. 믿는 구석 덕분이었다. 한국 땅에서 나는 식재료에 수렴 진화된 한식의 근본, 된장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하기 위해 ‘봄동 된장찌개’를 검색했다. 있었다. 레시피를 살펴보지는 않았다. 된장찌개는 된장 푼 물에 채소 넣고 끓이는 간편식이었다. 평소 이용하던 주재료 시금치대신 봄동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는, 봄동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내가 요리를 건성으로 해도 무려 된장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된장이 틀릴 수도 있나? 무난한 식성을 갖고 있다는 자기 평가를 회의했다.


봄동이 아쉬울 리 없었다. 봄동이 없어도 시금치, 시래기, 양배추는 탄수화물을 싱싱하게 보좌했다. 라면 끓일 때 한 뿌리씩 넣기도 했으니 파도 웬만큼은 먹었다. 대체 가능한 싸구려라서 없어져도 괜찮은 봄동의 운명은 노동자로서 남 일 같지 않았지만, 그래서 조금 미안했지만, 밥상에서만큼은 맛없게 태어난 것은 네 탓이었다. 내게서도 잊혔다.


봄동은 올 겨울 마트에서 봤다는 인지조차 못할 정도로 존재감 없었다. 구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상품 스모그에 지나지 않았고, 내 식재료 소비는 목표 지향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났다. 엄마가 밑반찬을 보낼 때 봄동 겉절이를 같이 보낸 것이다. 배추에 빨간 양념 묻은 것, 김치인지 알았다.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불필요한. 것이. 내.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싫다. 예상치. 못한. 변수도. 싫다. 김치가 굳이 필요 없는 식습관으로 변했고, 고춧가루 묻은 반찬은 진미채든 김치든 하나면 됐고, 설에 가져 온 김치를 반도 못 먹은 상태였다. 엄마한테 몇 번을 말해도 통하지 않아서 포기했지만, 나트륨 숙제들은 역시 갑갑했다. 택배 잘 받았다고 전화할 때 시래기 이야기만 했다.


손도 안 댔다. 먹던 김치 다음이어야 했다. 흰곰팡이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노력이었다. 혈압 약을 먹는 주제에 밥을 먹고 물이 마시고 싶을 정도로 짜게 먹었다. 엄마의 순진한 호의가 만든 부작용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는 별 수 없었다.


강호동 뉴스 기사를 봐서 다행이었다. 강호동을 보자 문득, 엄마가 보낸 것이 김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록이었고, 그것이 봄동 겉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겉절이는 바로 먹어야 제맛이었기에 순서를 뒤집었다. 봄동이 아직 소금기에 덜 절여져 다행이었다. 3월 9일 아침 아삭, 아삭, 아삭, 봄이었다. 겨울로 단련된 초록의 근육질은 고기와 비견될 만했다. 소금기가 죽이지 못한 세포벽을 내 이로 씹고, 씹어 파헤쳐진 아삭함의 안쪽에는 기지개를 펴며 쭉 찢어지는 봄근육이 쫄깃쫄깃했다. 엽록소, 톡톡, 톡 트로피 하나를 주고 싶을 만한 스파클링의 상큼한 텐션이 입맛을 깨웠다. 유튜브에서 ‘강호동 봄동’으로 검색되는 영상 제목에 ‘전국 어린이들 편식을 치료했다는 봄동 비빔밥’은 내게 사실이었다.


강호동의 먹방 영상을 다시 봤다. 강호동이 밥 한 숟갈만 비벼 먹으면 좋겠다는 말에 할머니는 봄동을 무친 대야에 밥 한 솥을 퍼 비볐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엄마를 봤다. 강호동이 주걱으로 한 입을 먹는가 싶더니 곧 빈 대야를 긁어 먹는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체구가 작은 먹방러의 대식은 기괴한 구경 거리였지만, 강호동의 대식은 덩치만큼 합리적이었다. 침샘이 납득했다.


강호동을 흉내냈다. 대야까지는 아니지만 대접에 밥을 푸고, 좀 많다 싶을 정도로 봄동 겉절이를 비볐다. 최대한 많이 떠서 최대한 크게 우걱거렸다. 혼자 찍는 과장된 연출이 어색했으나 봄동에 더해진 엄마 손맛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오롯이 채웠다. 아마도 내 식사는 당신 손맛의 흐뭇한 자부심일 것이므로 내 먹방을 찍어 엄마에게 보내줄까 하다가 낯부끄러워서 실행하지는 못했다.


최소 식재료로 최대 봄을 만드는 공리는 그 자체로 내 취향이므로 매년 봄 엄마에게 줄 숙제가 늘어났다. 엄마의 숙제를 갑갑해 하는 아들놈과 달리 엄마는 아들의 숙제를 갑질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내 엄마로 기투된 엄마와 당신 아들로 기투된 내가 비벼낸 봄 한 그릇, 봄동이다. 발음은 [엄마]다. 된소리가 되지 못한 ㅁ이 내 입에 된서리를 걷어낸다.



이전 04화 먹은 것들의 자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