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렸던 거리와 속력의 무덤이다. 아직 달릴 수 있던 자전거는 계속 달리지 않아서 달릴 수 없어졌다. 녹이 먼지와 한 몸이 되었다. 자전거 주차장에는 버려진 자전거가 더 많았다. 자전거가 달리던 시절을 상상하면 무덤이 쓸쓸함으로 부풀어 오른다. 시절이 방치된 고물, 역지사지된 동병상련. 나는 이 나이에 자동차가 없다. 대신 자전거를 탔다. 버렸던 자전거에게 미안하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톱10 안에 꼭 넣고 싶다. 자전거는 내 몸만큼 속력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부린다. 자동차의 속력은 가솔린이나 전기에 빚지지만 자전거의 속력은 내 근력의 오롯함이다. 속력의 모든 지분이 내 것이므로 갈라지는 바람 맛에 나는 당당했다. 페달을 밟을수록 ‘할 수 있다’가 차올랐다. 내가 뛸 수 있는 속력보다 몇 배 빠른 속력은 내 안에 깃든 잠재력 같았다. 접근 가능한 희망의 맛은 달달했다.
주로 봄, 가을, 금호강 자전거 도로에서 탔다. 평일 정오 전후로 자전거 타는 사람은 드물었다. 강둑 위로 도로가 뻗어 있어 시야가 확 트였다. 자전거를 탈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힘껏, 속력이었다. 브레이크를 예비하지 않아도 되는 막무가내는 일상에 없던 무한 자유였다. 가깝게는 왕복 두 시간 코스로 대구 공항을 찍고 왔고, 멀게는 왕복 5시간 30분 코스로 영천에서 짬뽕 한 그릇 먹고 왔다. 농가, 논밭, 축사, 고라니, 왜가리, 황조롱이, 꿩, 뱀, 소, 말의 시간으로 일탈을 충전했다. 자전거 안장은 내가 생산한 풍경을 독점해도 되는 정당한 왕좌였다.
자전거의 실용성은 보다 확실했다. 교통비를 뽑았다. 전문대 강의 갈 때 자전거 도로를 타면 50분 안팎의 버스보다 근소하게 일찍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버스 기다리는 시간, 버스가 길을 돌아가며 막히는 시간에도 자전거는 달렸다. 공부방도 지하철역에 오가는 시간 포함하면 40분쯤 걸렸지만 자전거는 70분쯤 걸렸다. 이동에 소비되어야 할 80분을 제외하고, 왕복 60분으로 자전거 140분 운동량을 얻는 셈이었다. 지하철 4정거장 거리 병원이나 도서관도 자전거로 오갔다.
내가 버린 로드 자전거는 이마트에서 산 139,000원짜리였다. 운동 목적이므로 고가의 기능성은 무의미했다. 브레이크가 닳을 때까지 탔다. 브레이크로 감속하고 발로 제동하면 그럭저럭 탈 만했다. 그러나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에 부딪칠 뻔한 후, 버리기로 했다. 브레이크만 갈면 되었지만 걸핏하면 타이어 안쪽 공기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성가셨다. 버스 정류장 자전거 주차장에 세워뒀다.
택배, 스마트폰은 훔치지 않아도 자전거는 훔쳐 가는 나라에서 금방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자전거는 사흘 간 그 자리에 있었다. 폐차할 때 뒤숭숭해진다는 차주의 기분을 이해했다. 녀석과 달렸던 길의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함께 한 시간 그 자체로 아쉬움은 구체적이었다. 나의 왕좌가 벌써 녹, 먼지의 무덤과 한 몸이 된 듯했다. 퇴근길에 다시 끌고 왔다. 몇 주 더 타다가 기어이 골목에서 또 아찔해진 후, 버렸다.
당근 온도 99.9도에게서 중고 MTB를 50,000원에 샀다. 자전거를 타되 자전거를 잘 몰라서 99.9도를 신뢰했다. 그를 만나러 자전거로 30여 분을 달려가서, 새 중고 자전거를 사고 내 자전거를 상가 구석에 세워뒀다. 브레이크 작동 여부만 확인하고 구매했다. 옛 자전거를 향한 안녕은 매몰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보다 안전해서 신났다. 옛 자전거가 새 주인을 만나길 바랐다. 어쩌면 내게 자전거를 판 99.9도 손에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는 당근쟁이인 듯했다. 99.9도가 조작이 아니라면, 그도 자전거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게 판 자전거는 오래 방치되었다가 표면만 닦이고 체인에 기름칠 된 모양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타이어 안 공기 주머니가 터졌다. 그때 보니 타이어는 경질화 되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공기 주머니는 이후 몇 번 더 터졌고, 반 년 만에 타이어 실밥이 드러나 앞뒤 타이어를 다 갈았다. 나중에는 아예 휠도 구부러졌다. 돈 조금 더 보태 새 자전거를 사는 게 나았었다. 버렸던 기억 때문에 이번에는 계속 고쳐 탔다. 브레이크까지 갈았기에 버렸던 자전거에게 더 미안했다.
병원이나 식당에 들릴 때 굳이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다. 훔쳐가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다. 도난당할 기회라도 줘야 공평하다는 뒤틀린 균형 감각이자 도난당해도 아쉬울 것 없는 자유였다. 간혹 체인에 WD나 뿌려줄 뿐, 미세먼지를 뒤집어쓰든 비를 맞든 닦지도 않았다. 자전거는 내 몸이 가닿을 수 있는 자유의 확장된 표현형을 실현시키므로 마음도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궤변까지 더했다. 그러나 내게 머무는 한, 너는 자전거였다.
그곳은 주차장이지만 폐차장이었다. 나열되어 있으되 무질서한 자전거들을 보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생각했다. 유기견이나 유기묘는 돌아다닐 수라도 있지만 돌아다니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전거는 끝나지 않는 정지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달리던 꿈과 달릴 꿈의 경계가 무너져 영원한 거짓말만 이어졌다. 달릴 수 있지만 끝나지 않는 불구의 시간을 견뎌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자전거 폐차장을 보면 역시, 시절이 방치된 고물, 역지사지된 동병상련, 내가 구체적으로 보였다. 취업 앞에서 나는 고물이었고, 상담 전화 한 통을 신의 목소리처럼 기다렸었다. 당분간 자전거 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킥보드가 등장하면서 자전거는 훔쳐갈 유인도 떨어졌다. 학생들은 속력을 만드는 데 굳이 몸을 들이지 않았다. 푼돈으로 구매한 속력은 골목 구석구석까지 막무가내였다. 몸맛이 결여된 속력은 인스턴트식품처럼 간편하고 맛있는 모양이었다. 자전거가 합성하는 가성비는 촌스러워진 듯했다. 폐차장의 시간은 길어지며 깊어진다. 아무도 모른다. 부주의 맹시 속으로 사윈다. 자전거는 ‘사람이 타고 앉아 두 다리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서 가게 된 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엔 한때 속력이었고, 사실은 아직도 속력일 수 있는 물체만 있다.
폐차된 자전거를 지나칠 때 간혹 타이어를 꾹 눌러본다. 공기가 차 있으면 차 있는 대로, 공기가 빠져 있으면 빠져 있는 대로, 어이, 자전거, 마음속으로 불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