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게시판 광고 넣느라 전단지 들고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돌던 때였다. 메트로팔레스에서 범어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액자로 갈무리 된, 꿈이 버려져 있었다. 시화 제목 ‘꿈’에 내 죄의식이 저격당했다. 나는 꿈이 아니라 밥 벌어먹겠다고 발품 파는 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예나는 꿈을 몰랐다. 요리에 느낀 흥미를 꿈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현명했다. 요리사, 소방관, 선생님, 저 계통 없는 후보들은 정당했다. 시화에서 시인이 자라는 것도 합리적이었다. 아홉 살짜리의 흥미는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몰랐고, 무엇이 되고 싶든 무엇이 될 수 있었다. 갈팡질팡은 아홉 살짜리의 권리였다.
액자까지 맞춘 시화라면 학교에서 관심 받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시화가 전시된 날, 역시 나야, 예나는 키가 하늘만큼 커졌을 것이다. 부모님은 예나의 새로운 재능에 주목했을지도 몰랐다. 새로운 미래는 별자리처럼 신비롭게 반짝였을 것이다. 별자리마다 깃든 신화를 읽어내는 것을 삶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아의 신화를 연성하는 연금술사였고, 예나는 보통의 수성구 학생이 된 듯했다. 수성구는 연성되어야 할 것이 숫자로 고정된, 지방의 대치동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시가 시화로 제작되어 복도에 전시됐었다. 약간 우쭐했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부러움 받지 않았다. ‘역시 나’가 되는 것은 역시나 당연했다. 체육을 제외하면, 노력으로 거두는 성과는 내게 보통의 일이었다. 내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므로 성적은 적성을 초월한다고 믿었다. 성적과 무관한 이벤트는 생활의 소소한 활력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내 시화도 예나의 시화처럼 사화되었다. 완전히 잊고 지내다가 예나의 시화 때문에 문득 생각났을 뿐이다. 당시 내 꿈은 과학자였다. 대통령인 적도 있었고, 기자인 적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내 성적이 만들어 낼 것들인데 자꾸 보채는 장래희망이 사실 귀찮았다. 묵묵히 설득력 있는 성적을 쌓아 나갔다. 상장은 서랍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겠지만, 시화는 지나치게 컸다.
내 꿈이 그렇게 컸나. 아무도 장래희망을 묻지 않으며 갈팡질팡의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 소설가를 진지하게 새겨 넣었다. 이후 내 인생은 구체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숫자 밖에서 나는 무능했다. 노력으로 닿지 못하는 세계가 낯설고 무서웠지만 터닝 포인트는 지났다. 친구 송과 김의 아들딸이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내 딸이 요리하느라 어지럽힌 부엌을 두고 옥신각신할 미래를, 나는 꿈에게 빼앗긴 셈이었다. 작가가 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20대와 30대를 성실하게 방관한 결과다. 지금도 실패 중이다.
엄마는 시화를 버리지 않으셨다. 전시하지 않았지만, 창고가 된 본가 내 방에 상장처럼 처박혀 있다. 엄마는 내 물건이라면 고장 난 카세트도 버리지 못하는 분이셨다. 그러나 예나 부모님은 버리셨다. 이삿짐에 딸려 버려졌다면 불가피한 사연을 곱씹어봤겠지만, 예나의 시화는 홀로 덩그랬다. 주변에 3학년은커녕, 학생을 유추할 만한 다른 쓰레기도 없었다. 내가 버려진 적 없어서, 딸의 흔적이 버려지는 사연은 읽히지 않았다.
예나가 보통의 수성구 학생이 되었다면 개연성이 생겼다. 수성구는 꿈을 잡아먹는 곳이었다. 학생이 어떤 꿈을 갖든 국영수에 상납했다. 대학이라는 외연을 갖추지 못한 꿈은 외면 받았다. 현실이 프렌차이즈화 된 인생 집성촌에서 낭만은 어리석은 농담이었다. 특목고나 자사고를 준비하지 않는 한 중학교 내신이야 큰 의미 없는데도 점수에 집착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학생도, 피디가 되고 싶은 학생도, 성적 쟁탈전에 참전했다. 중3에 고2 수학까지 선행이 끝난 학생이 흔했다. 챗GPT가 등장하든, 내신 5등급체제가 예고되었든, 이곳에서는 숫자만이 정답이었다. 학교도, 학원도, 숫자에 길들여져 있으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숫자 밖을 보는 학부모님들에 내게 연락 주셨다.
숫자가 오답은 아니었다. 효율성이 떨어질 뿐,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해 본 사람은 다른 일도 열심히 했다. 토익 점수가 성실도 측정 도구로 전락한 것처럼, 내신과 정시는 성실함의 공덕을 쌓는 일이다. 그러나 전국에 평범한 우등생은 많았다. 시장 사회에서 공급이 많은 것들은 몸값이 깎였다. 제 살 깎기 위한 책상 앞의 인내는 가련했다.
꿈이 없는 학생도 많았다. 학생들은 장래희망의 빈 칸을 머쓱해하지 않았다. 당당했다. 그냥 공부했다. 혹은 공부하지 않았다. [연금술사]는 나와 학부모세대의 베스트셀러일 뿐이었다. 경제 성장기의 끝물, 꿈에 닿지 못해도 꿈은 실패를 향해 질주하는 동안 좌절감을 마비시켜 줬다. 그러나 챗GPT가 등장한 이상 기존의 좌절 면역 체계는 작동하기 힘들어졌다. 꿈에 도전할 기회조차 가파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15년 후, 요리사, 선생님, 소방관 중 예나가 도전할 수 있는 직업군은 무엇이 남아 있을까? 꿈을 버린 것, 예나는 역시 현명했다.
챗GPT에 적응되기도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와 전화상담원이 대량 해고 되었고, 갤럭시 S24는 동시통역 수준의 폰을 내놓았다. 아이들은 꿈을 꾸는 순간, 불가능을 예약한다. 실패할지 알면서도 도전하는 낭만은 3인칭일 때만 멋있다. 꿈을 없애야 했고,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숫자 쟁탈전이라도 치르는 중인가 싶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자존감을 보존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꿈의 찌꺼기가 발효되는 시간을 견뎠더니 논술의 시간이 왔다. 소설의 무능이 논술에 유능했다. 숫자 쟁탈전 방식에 서술형과 수행평가가 끼어든 덕분에 먹고 사는 일이 보다 수월해졌다. 어떤 지인은 내게 학원으로 확장하라 하고, 다른 지인은 1인 법인을 설립하라고 했다. 정확한 현실감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현명하지 못하다. 보통의 수성구 강사처럼 돈이라도 많이 벌면, 그래서 어쩌라고, 한 번도 내게 닿은 적 없는 저 고집쟁이가 반문한다. 광고비보다 광고 전단지 돌리느라 소모한 한 나절도 아깝다.
나도 안다. 꿈을 버려야 산다. 나는 쓸 만큼 썼고, 여기까지의 재능이다. 차라리 30여 년 전 시화 만들 때, 내게 문학적 감수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글쟁이는 싹부터 뽑았어야 했다. 여기까지의 재능은 잡초처럼 자랐다. 작가도 아닌 주제에 글을 읽거나 쓰다가 가끔 수업하는 생활사를 바꿀 생각이 없다. 인생이, 잡초가 무성한 공터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침몰 중이다.
예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