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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Feb 23. 2024

트로피를 버린 사람

“영감님의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나요?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슬램덩크] 강백호의 질문이 나를 겨눴다. 만 16세짜리가 마흔 넘은 아저씨에게 참 건방지구나, 영감(令監)이 된 기분이었다. 도서관 가는 길에 영광의 영감(靈感) 따윈 없었다. 도서관의 이름만 달라질 뿐, 20년 전에도 갔었고, 10년 전에도 갔었다. 10년 후에도 가고, 20년 후에도 갈 게 뻔했다. 일이 없는 날, 갈 데는 도서관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도서관대표도 아니었다.


“전, 지금입니다.”

트로피들은 강백호처럼 말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학생 식당 옆 인도에 버려져 있었다. 가지런히 쌓인 잡동사니 사이 종이상자에 담긴 채였다. 그 건물에 동아리방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동아리가 폐부되며 짐이 정리되었다고 짐작했다. 동아리방 이사일 수도 있지만 아침 9시였고, 걸어오며 주시하는 동안 관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오래된 지금’은 교내 쓰레기 수거 트럭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11년 전 가요제 인기상과 대상, 9년 전 축구 대회 무슨 상 트로피였다. 잘 닦인 금박은 광났지만 영광의 후광을 잃었다. 이미 이 때를 기억하는 재학생은 없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 얼핏 이름은 들어봤을지도 모를 선배의 영광은 지금 속에서 익명의 이물질이었다. 트로피에 매달린 리본은 인적 끊긴 서낭당 금줄 같았다. 고대 기억을 봉인한 금줄은 지나치게 선명하고 빳빳해서 을씨년스러웠다.


트로피의 순간에 기쁨, 환희, 감격, 감사, 자부심이 융합해 폭발한다. 자의식은 이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찢긴다. 찢어진 틈으로 질질 흐르는 엔도르핀으로 자아가 도포된다. 자아는 술과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액상으로 물크러져 타아와 뒤섞인다. 엔드로핀의 집체가 나 하나로 응집되는 환각은 현실적이다. 그날 밤, 플라스틱에 씌워진 금박은 모두이자 나의 지금이어서 순금이었고, 순금으로 된 추억의 보금자리는 영원할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환호성이 휘발되고 껍데기만 남았다.


껍데기를 뒤집어 써야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다음날 그들도 도서관으로 귀환했을 것이다.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해 청춘을 세금처럼 지불하고 가까스로 지금 하나를 획득하면 입금과 출금의 순환 속에 안전하게 구금된다. 청춘에 쌓인 부채감은 지불 유예 선언한 적 없이 선언된다. 앞으로 내게 트로피의 순간이 다시 올 것 같지 않음을 확신이 단단해진다. 트로피를 향해 집념을 발휘해야 하는 의무감은 임금 앞에서 피곤하고, 부당하다. 강백호의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


“난 나를 대표한 적도 없는 것 같아.”

참, 별 거 없는 인생이었다. 앞으로도 별일 없길 바라는 별 거 없는 인생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열심히 아무 것도 안 함 상’ 수상 후보들이다. 돈을 벌었거나 못 벌었다. 자의식이 약한 인간은 생물학의 질서에 안주하고, 자의식이 강한 인간은 강백호가 묻지 않았으면 의식하지 않을 열등감을 가산세로 치른다. 자존감을 파먹는 자의식이 얄밉다.


영광의 순간을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발상은 오만하다. 우리는 천재도 아니고, 불꽃 남자도 아니다. 국민 평균 5등급이다.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충족하는 성취나 희생은 시시해서는 안 된다. ‘좋아요’의 양으로 산술되는 영광은 가짜다. 소비되는 유행과 소유하고 싶은 영광은 다르다. 범부들은 메시나 페이커의 대관식 들러리다. 들러리의 우레와 같은 박수로 영광이 완성된다. 들러리들은 감정이입 능력 덕분에 엔도르핀의 콩고물을 얻어 먹을 따름이다.


영광은 삶의 필수 영양소인 모양이다. 범부들도 생일을 챙김으로써 영광을 흉내낸다. 생일 케이크는 트로피를 닮았다. 축하와 박수가 주연에게 집중되는 기작도 같다. 영광은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환각이고, 이 환각의 힘으로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날들을 버티는 기적이 지속된다. 유사 영광 영양제로 존재의 영광 최소량이 보존되는 것이다.


가장 한찮은 영광으로 충전되는 존재감은 같잖다. 누구나 가진 선천적 요인은 기념할 만한 조건이 아니다.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도 없고, 노력한 적도 없으면서 영광을 덧입히다니, 뻔뻔하다. 무엇보다도 별로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과 유사 영광을 품앗이하는 관습이 귀찮다. 트로피를 보고 있으니 문득, 나는 영광 최소량을 충족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받지 못한 트로피를 생각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은 내 생에 유일하게 톤이 다른 1년이었다. 선배들은 새내기를 우쭈쭈해줬고, 나는 처음 받아보는 무조건적 환대에 동네 똥강아지처럼 여기저기를 꼬리쳐댔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단대 가요제에서 상을 만들었다. 노래를 잘한 게 아니라 헤드뱅잉이 시대를 조금 앞섰을 뿐이었다. 심사위원인 학생회 선배들과의 친분이 새로움을 명분 삼았는지도 몰랐다. 학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아리, 학생회 사람들까지 응원해줬다. 응원 규모가 컸기에 인기상 정도는 기대했는데, 대상이었다. 앵콜 무대에서 타학과 사람들은 보이콧했으나 신경쓸 틈이 없었다. 그날이야말로 강백호의 영광의 순간과 엇비슷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광의 물증이 없는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그날 이후 소소하게 받은 트로피는 요식적 박수만 받았다. 시상식에 혼자 갔고, 수상 소식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상금만이 진심이었다. 사소하지 않았으나 사사로웠다. 트로피에 남아 있지 않은 영광을 생각하며 생일 축하 품앗이의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 나는 접근 금지의 표식을 걸어둔 폐광 같았다. 고작 글감 하나 건진 것에 빙긋 웃을 뿐이었다. 폐광 안에서 석탄 빛깔의 웃음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더이상 내게 기대를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기대가 아니라 월급 근처의 의무다. 의무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된다. 잘 수행한 의무를 칭찬받아 영광스럽다면, 노예다. 저물어버린 ‘나 때’를 만지작대는, 노화다.


도서관에서 이 글의 초안을 다듬는 내가 상자 속 트로피 같았다. 여전히, 톡도, 전화도 귀찮다. 냉소로 빚은 트로피 하루오에게 무례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퉤.


초안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다 [쓰레기 읽기2]가 Today's Pick 요즘 뜨는 브런치북 3위까지 올랐을 때, 나는 5분쯤 기뻤다가 금세 감정이 식음으로써 오해를 인정했다. 트로피의 날, 내가 대단해서 박수 받은 것이 아니라 박수 받아서 내가 대단해진 것이었다. 박수에는 등급이 없고, 박수 없는 영광은 조형물에 불과했다. 내가 아쉬워 해야 하는 것은 받지 못한 트로피가 아니라 그날 사람들 대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 송만 남았다. 그나마도 1년에 두서너 번 봤다. sns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많은 이들의 연락처를 몰랐고, 더 많은 이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트로피를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버린 것이다.


회상 속에서 길가에 버려진 트로피를 지나치며 묻고 싶었다. 사회 초년생 딱지도 뗐을 당신들은, 영광의 순간을 기억하는지. 트로피의 날, 혹은 어느 생일, 혹은 어떤 날, 당신도 산왕전의 강백호처럼 사람들이 보내는 기대나 축하의 중심에서 우뚝 섰었을 텐데, 그날의 사람들과 이어져 있는지. 이어져 있다면 아쉬울 것 없는 조형물이었다. 잘 가라, 누군가들의 어느날 엔드로핀 대접아.


도서관 안 개구리에게 시험 직후 학생 없는 오전을 독점하는 정도가 영광이 되는 사태는 참 구리다. 굴비로 쓴 시(詩)절임이라도 먹어야 하는 시절이라는 농담으로 비굴함을 무마한다. 농담에도 영 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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