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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01. 2024

우리 엄마가 캣맘이 되다니

엄마는 양심 없는 누군가를 욕했지만, 나는 죽은 사람부터 생각했다. 길가에 100리터 들이 두 봉지가 버려져 있었다. 반투명 비닐 안에 인스턴트 냉동/냉장 식품이 비쳤다. 엄마는 200ml짜리 서울 우유팩 무더기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유통 기한 한 달 정도 지난 것들이었다. 하나를 뜯어 맛 보시더니 괜찮다고 하시며 우유들을 챙겼다. 설날 오후, 초등학생 저학년 조카들을 이끌고 엄마와 길고양이 밥 주러 가는 길이었다.


난감했다. 우리 엄마가 캣맘이 되었다. 캣맘은 동정심에 복종하는 비합리적 무책임가(家) 정도로 인지해 왔었다. 생태계 교란종은 불가피하게 존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의 측은지심을 그만두시라 말릴 수도 없었다. 전화마다 확인되는 ‘밥 먹었나?’의 진심을 안다. 그저, 길고양이들은 식수 구하기가 힘들어 신부전증을 앓기 쉽다고 일러드렸다.


비닐 봉지 옆 종이봉투에 쌀도 4kg쯤 버려져 있었다. 벌레 없이 말끔한 새 쌀이었다. 묵은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엄마는 봉투를 확인하시더니 기초수급자에게 지급되는 쌀이라고 했다. 노인들은 식사량도 얼마 되지 않고, 경로당에서 끼니를 해결할 때도 많아 쌀을 다 못 먹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엄마는 새 모이 주면 되겠다고 좋아하셨다. 새끼를 자기 손으로 먹여 키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관이었을 것이다.


나는 버려진 쌀이 이해되지 않았다. 쌀은 하찮되 신성했다. 그 어떤 무뢰배도 밥에 담배를 비벼 끄지 않았다. 노인들에게 쌀의 신성성은 덜하지 않을 것이고, 기초수급자가 ‘쓸모’를 버리는 심리도 상상되지 않았기에 쌀이 버려지는 사연은 내게 죽음으로만 설명되었다. 쌀 봉투를 들 때 죽은 쌀이 아니라 산 쌀, ‘새 밥’이 새삼스러웠다. 나는 단 한 번도 새 밥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새, 고양이 밥 주러 가는 길은 엄마의 조깅 코스였다. 조깅하다가 길고양이가 치근대기에 몇 번 쓰다듬어줬더니 엄마를 따랐다고 했다. 그러다 엄마가 집에 있는 개밥을 나눠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양이는 엄마에게 재롱을 부렸고, 노랑이는 아직도 엄마를 경계했고, 까망이는 보름쯤 안 보인다고 했다. 최근 한파랄 게 없어도 겨울이었고, 들개도 많았다.


기계화된 요즘도 주울 이삭이 남는지 모르겠지만, 있다 한들 2월에 남아 있을 이삭은 없을 법했다. 빈 논에 오종종 모여 있는 새들에게 먹을 것을 찾는 것과 먹을 것을 참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가면 새들이 멀리 도망쳤다. 이제 막 열 살, 여덟 살 난 여자 아이들이 새를 따라 가려는 것을 붙잡았다. 필요 이상의 안전거리가 필요한 피식자의 사정을 어린 포식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그 거리를 무시하고 침투한 게 인간이었다. 인간은 동물들에게 필요 거리(thing)와 필요한 거리(距離)를 주지 않았다. 전깃줄에 나란히 앉은 까마귀들이 무생물처럼 햇볕을 쬐었다. 무생물이야말로 인간에게 적응하는 생물의 방식이라면, 문명의 잿빛 무생물성은 온난화로 힘빠진 겨울을 대신한 혹한이었다. 새들이 있던 자리에 쌀을 흩뿌렸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처럼 쌀알이 우리 뒤를 좇았다.


마녀라도 살 듯했다. 길고양이는 폐양계장에 살았다. 들개 무리를 피하려면 고양이에게는 안전한 높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주변은 농가에서 떨어진 허허벌판이었다. 공장이 들어서려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계속 비었다고 했다. 본네트를 흠집낼 자동차도 없었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찢을 민가도 없었다. 명절이라 그런지 우리가 한 바퀴 도는 동안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이곳의 길고양이는 얌전히 멸종을 기다리는 생명의 의외성에 가까웠다.


길고양이 밥 주는 곳 30여미터 전에 엄마는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조카들이 시끄러워 고양이들이 겁먹는다는 것이다. 나와 조카들은 공터에서 서로에게 쌀을 던져가며 놀았다. 조카들이 나를 협공했으나 성인 남성의 전력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조카들의 정수리에 쌀알을 하나씩 콩콩 박아 넣었다. 당하기만 하던 조카들은 쌀을 한 줌씩 마구 던졌다. 쌀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참새, 비둘기, 까치, 까마귀를 비롯해 이름 모를 새들을 기다리게 될 것이었다. 쓸모가 실현될 기다림은 설렐지, 불안할지 알 수 없으나 조카들이 신나서 나도 신났다. 그 역시도 쌀의 유용성이었으니 쌀을 주워오길 잘했다. 이왕 도정된 쌀의 기다림은 필연을 향한 신난 여정이길 바랐다. 쪼그려 앉아, 하양이가 풀숲에서 나타나 엄마에게로 총총 걸어가는 것을 보는 사이 큰 조카가 내 목덜미에 쌀을 쏟아 넣고 꺄르르댔다.


까마귀는 울지 않았다. 까치도 울지 않았다. 참새도 재재되지 않았다. 조카들의 재잘대는 웃음이 들판을 가득 채웠다. 나는 고독사 하는 노인을 상상했다. 울었을까. 노인이 남긴 쌀이 새 밥이 되는 자연 현상이 괴괴했다. 노인의 쌀을 먹을 어떤 까마귀가 시간 너머의 노인을 응시하고, 노인도 공간 너머의 까마귀를 보며 고요를 나눴기를 바랐다. 울지 않은 것과 울 수 없는 것이 다르지 않는 인간 현상에게 나도 침묵을 보탰다.


엄마 말로는 까마귀 숫자가 작년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아마 사람도 줄었을 것이다. 속도의 문제일 뿐, 방향은 확실하다. 인구가 늘 일은 없다. 저출산 시대, 지방은 폐양계장에 수렴해 가는 중이다. 먹이가 없다. 지방이란, 유통기한 지난 서울이다. 인간은 자연을 멸했듯 중심의 인간은 주변의 인간을 멸하고 있다. 멸하는 인간에게 멸해진 인간은 같은 종이 아니었다.


조카들과 전투가 있었던 곳에 쌀이 줄어 있었다. 고양이 밥 그릇은 비어 있었다. 고양이는 없었다. 엄마는 이상하다며, 당신이 나타나면 귀신 같이 나타나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며 ‘나비야! 나비야!’ 큰 소리로 부르셨다. 잠시 후 경계심 심한 노랑이가 나타났다. 엄마가 있는데도 밥 그릇으로 달려온 걸 보며, 엄마는 어제 엄마가 준 먹이 이후로 굶었겠다고 혀를 차셨고, 나는 우유가 상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비야! 나비야!”

하양이가 나타나자 엄마는 안도하셨다. 고독사 중인 노인이 들은 마지막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노인이 남긴 우유 덕분에 고양이들은 며칠 더 살 것이고, 검정이는 그날도 보이지 않았다.


부를 이름이 사라질 언젠가의 들판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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