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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15. 2024

대한민국 최고 프렌차이즈

곱게 죽여 달라는 읍소였다. 살고 싶다는 애원이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리다 못해 달라 붙었다. 길바닥에 문구점 점포 정리를 알리는 전단지가 청테이프로 테두리를 두르며 붙어 있었다. 걷다 보니 또 있고, 또 있었다. 인쇄된 것이 아니라 매직펜으로 일일이 쓴 것이었다. 할인율은 구매할 확률이라는 농담에 침묵해야 했다. 50~70%는 어느 자영업자의 낮아진 생존 감소율에 가까웠다. 인쇄비 장당 50원도 아껴야 하는 생(生)을 향한 호소를 사람들은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어느 문구점 점포 정리는 대수롭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점점 많아졌다.


2024년 대한민국 최고 프렌차이즈는 단연코, ‘임대’다. 코로나 펜데믹이 수습된 이후에도 임대의 확장세가 예사롭지 않다. 자영업의 지난함은 펜데믹 이전에도 상식이었다.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자영업자 생존율은 1년 65.9%, 3년 44.3%, 5년 22.8%였다. 각박한 확률 안에서 창업과 폐업은 순환하며 어떻게든 공실(空室)이 채워지던 시절마저 끝나갔다. ‘공(空)’이 굴러다니며 ‘실(實)’을 쓰러뜨렸을 때, 속수무책으로 공실(空室)이었다.


이곳은 대구 위성도시 대학가다. 나는 그 중에서도 변두리에 15년째 산다. 상가의 흥망성쇠는 공실의 번식으로 정리되었다. 할인마트는 규모를 줄인 편의점으로 대체되었고, 한 번도 완실된 적 없는 듯한 5층 빌딩은 1층만 겨우 굴려 나갔다. 살아 남은 것들은 인테리어에 재투자 하지 않고 빛바래가며 공실의 그림자를 껴입었다. 오히려 대학가 중심보다 나은 지도 몰랐다. 외국인들 덕분에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중국 식당들이 들어섰다. 그 5층 빌딩의 1층도 철 지난 인형 뽑기 기계를 들여 놓았다가 아시아 식재료 마트로 공에 저항했다.


대학가 중심은 아직 괜찮았다. 창업과 폐업이 순환했다. 인테리어업자만 돈 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리모델링과 업종 변경이 빈번했지만 아무튼 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오렌지 로드 170m를 중심으로 둘레 1km의 경계를 벗어나면 인테리어업자도 일자리를 잃었다. 당장 오렌지 로드 직선 끝에 있는 pc방 2, 3층이 몇 달째 공실이다. 경계에서 벗어나 주택가에 가까웠던 마트 자리는 몇 년째 공실이다. 폐업한 문구점은 마트보다 중심가에 가까웠지만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공실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 단계로 진입했다. 대구 중심지 동성로도, 지방의 대치동 수성구도, 중심의 번화함에 가려져 있을 뿐, 주변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공실에 잠식되어 갔다. 12월 말, 동부교육청에 갔다가 동성로에 들렸다. 이 시기의 동성로는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안 나기에 체감되었다. 연말연시의 축복과 거룩함은 밀도가 낮았다. 중심으로 향하는 길에도 임대가 흔했다. 유리벽에 붙여진 ‘임대’ 플래카드마저 빛바래 있었다. 하긴, 동성로의 중심인 대구백화점조차 2021년 이후로 폐점되었다. 공간은 이가 빠진 노인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대구의 캐치프레이즈 ‘파워풀’은 발기되지 않는 노인의 공허한 자존심 같았다. 2023년 대구 인구 순유출 8천 명이고 그 중 20대가 7,100명이었다. 파워풀한 숫자다.


수성구 학원가 학생들의 꿈은 대구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위해서, 집에서 나오고 싶어서, 그냥 서울이 좋아서 서울에 가고자 했다. 인서울을 위해 비상식적인 돈이 사교육에 몰렸다. 비수성구 사람들에게 수성구는 인서울과 유의어였다. 비수성구에서 수성구까지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도 있었다. 당장 나도 동구, 북구, 중구, 달서구에서 오는 학생을 데리고 있었다. 비용이 들더라도 수성구는 서울로 가는 확실한 추진체였다. 그러나 이곳 상권도 비실댔다. 학원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공실이 눈에 띄었다. 작년, 혹은 재작년, 공부방에서 50m 거리에 단독 주택 자리에 4층 빌딩이 들어섰다. 우리동네 5층 빌딩과 운명이 엇비슷했다. 1층에 입점한 편의점이 1년을 못 버틴 듯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점한 인생네컷도 컷 됐다. 건물 전체에 1층 일부만 카페로 쓰였고, 건물 전체가 공실이었다. 건물주의 대출이자 공포를 생각하면 내 월세 신세가 평화로웠다.


상권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택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돈을 쓰지 않고, 손바닥 안에서 ‘언젠가 어딘가’에 돈을 썼다. 경부선에 걸쳐져 있는 지역에서는 어떤 물건이든 어지간하면 다음날 문앞까지 배송받았다.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택배차의 궤적은 지금 여기가 난도질된 자상이다. 자영업은 식당과 카페의 아수라 속에서 네일숍이나 미용실이 좀비처럼 죽었다 살아나는 정도로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죽어갔다. BTS, 봉준호, 손흥민이 만드는 회광반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성장의 귀납법은 끝났다. 이제는 비어가며 내려가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임대가 붙은 상점을 보고 있으면 내 차례를 가늠해 보게 된다.


스스로를 끝내기 위해서 전단지를 붙이는 자영업자의 심정을 알 길은 없다. 시작하기 위해 전단지를 붙였던 10여 년 전의 나도 충분히 불안했으므로, 그보다 더 끔찍할 막막함은 영원히 모르고 싶다. 동족의 장례식에 술 한잔 따라주는 기분으로 한번 가볼 법도 했지만 잊혔다. 전단지를 본 날 계획했을 뿐, 누군가의 처절함은 내 바쁨만 못했다. 문구가 필요할 때는 다이소에 갔다. 동선이 조금 더 가까웠고, 습관이었다.


다이소 가는 길은 폐업하는 문구점 반대 편이었다. 그 길에 다른 문구점도 있었지만 15년 동안 그 문구점은 딱 한 번 갔었다. 캐치볼할 고무공을 사려고 했을 때였다. 이때 폐업한 문구점에도 갔었다. 어디에 먼저 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한 곳에 없어서 다른 곳에서 샀었다. 그 이후 이들은 내 생활 영역에 있지만 없는 공간이었다. 문구가 필요할 때도 인터넷 주문하거나 다이소에 갔다. 최근에도 인주를 사러 문구점을 지나 다이소에 갔다. 주인과 대면하지 않는 익명이 편안했다. 직원들은 인격으로 표지되지 않아서 나도 마음껏 익명이었다. 그래서 문구점은 사라지고나서야 내게 표지되었다. 일종의 고독사였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은 인격의 공실에 수렴해 갔다. 기능적 친절함만 있으면 될 뿐이었다. 인격을 버려야 살 수 있다면, 우리야말로 다이소에 전시된 1,000원짜리 2,000원짜리 상품들이었다. 다이소 물건들은 저렴하게 제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자를 닮았다. 그래서 문구점은 끝내 폐점되었다. 전단지도,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며 문 앞에 붙은 ‘임대’를 보고서야 상기했다. 그곳에 어떤 가게가 들어서야 살 수 있을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인격도, 돈도,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갔다. 가상 공간의 무한함에 현실 공간이 짓눌린다. 임대료가 떨어지면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까? 아니면 인테리어하지 않는 것으로 현실을 버티며 퇴색되다가 끝내 공으로 종료될까? 아직은 나와 무관한 질문을 향해 사실은 나도 걸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곱게 죽여 달라는 읍소를 조용히 준비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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