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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29. 2024

혐오3 - 인간

12월 24일 퇴근길, 고요한 밤이었으나 거룩한 밤은 아니었다. 최저기온 영하 6도, 인적이 일찍 끊겼다. 어떤 노숙인만이 근린공원 정자에서 웅크려 자고 있었다. 침낭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두꺼운 이불 사이에 햄버거 패티처럼 박혀 있었다. 숨은 쉬어질까 싶었다. 패티가 냉동과 싸우는 모순은 지나치게 싱싱했다. 오직 자신의 체온만으로 영하의 밤을 버텨야 하는 영광이라니, 은총은 따뜻할 수 있는 자들의 기만이었다. 그날 밤, 그는 신도 버린 인간이었다.


따뜻한 두유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을 괜한 오지랖이라며 무질렀다. 편의점을 지나쳐 국밥집에서 야식에 가까운 저녁을 먹었다. 겨울밤 국밥 한 그릇으로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두유 정도는 건넬 넉살이 충전되었다. 그러나 오다가다 마주쳤을 때, 어정쩡하게 아는 체해야 할 가능성이 불편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 마음껏 따뜻했다. 불 꺼진 방 인터넷 세상은 온통 메리 크리스마스였고, 나는 이 모양이었고, 그는 그 모양이었다. 그를 버린 것은 신이 아니라 나였다. 인간 존엄성은 메리 크리스마스 안의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계급의식이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 동사한 그를 봤다. - 이 문장을 써 보고 싶었던 마음이 뒤통수를 딱, 때렸다. 소위 콘텐츠 각이었다. 인간이 냉동 패티가 되는 일은 내 마음 구석에서 먼저 일어난 셈이었다. 나는 내가 조금 징그러웠지만, 인간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절대 다수의 지분은 동정심이 차지했다. 그가 없어 안도했다. 그의 이부자리가 정자 아래 잘 개켜져 있었다. 사람은 쉽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며칠 후 아침, 나는 그의 개켜진 이부자리 사이에 핫팩 한 박스를 넣어 주었다. 내 선행의 최종 동기는 이기성이었다. 이타성은 마음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핫팩을 사넣는 번거로움은 SNS 좋아요와 글감을 직감한 덕분에 무마되었다. 나는 도덕적으로 몇 등급 인간이었을까?


“9등급 인간들은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지 않나요?”


중학교 3학년짜리가 물었다. 네가 자라면 내가 되겠구나, 하며 나는 나도 그다지 믿지 않는 말로 선생을 위장했다. 첫째, 9등급을 치우면 8등급 중 누군가가 9등급 역할을 하게 된다. 잉여는 평화를 위한 보조 장치로서 벌, 개미 사회에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다. 둘째, 9등급들을 혐오할 수 있는 것은 내가 9등급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오는 권력 행사다. 1, 2등급이 된 것은 좋은 환경에서 좋은 유전자로 태어난 우연의 산물이다. 8등급은 9등급을 혐오하더라도 다음이 자신이기 때문에 치울 수 없었다. 셋째, 9등급은 8등급의 도덕성 유지 수단으로 필요하다. 하부의 타락성으로 도덕성의 우열 피라미드가 건축되고, 이 피라미드의 최종 이름은 사회 질서다. 무가치는 가치를 표지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맹목적으로 환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진심이 아니었다. 학생이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진심이었다. 너는 내 마음 속에 도사린 괴물을 모른다. 나는 힘 없는 히틀러다. 발산하지 못한 혐오는 오롯이 나를 학살한다. - 인간은 존엄하지 않다.


인권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다. 노숙인을 너머 강간범, 살인범과 내 인권이 동일하다는 주장은 내 삶에 대한 모욕이다. 존엄은 인간다움을 실천한 인간의 권리다. 나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가 싫고,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어야 사람이지.’가 좋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인간중심적 기만이다. 81억 인구가 일궈온 것은 꽃밭이 아니라 피밭이다.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타생물 멸종사와 궤를 같이 한다. 지금도 인류는 생태를 착취할 뿐이다. 대부분의 현실 인간은 쓰레기 생산자에 지나지 않는다. 선진국 소비 시민일수록 생태에 해롭다. 비행기/승용차를 타고, 골프를 치고, 유행 따라 옷을 사고, 소고기를 즐기고, 빨대로 음료를 마시고, 음식을 배달시키며 쓰레기를 대량 생산하지만 죄책감도 못 느낀다. 하늘, 산, 들, 강, 바다에 사는 생물종에게 인간은 진도 10 이상의 지진이 멈추지 않는 재앙이다. ‘최고의 친환경은 인구 감소’는 농담이 아니다. 인구의 절반을 날려버린 타노스는 진정한 생태학자로서 존엄했다.


부덕함에 막무가내로 부여된 인권은 위험하다. 인권이 풀어준 9등급짜리에게 물려 죽은 것은 진짜 존엄해야 할 무고함이다. 9등급들로부터 사설 보안 업체의 보호를 받으며 인권과 존엄성을 액세서리처럼 두른 인간들은 9등급짜리와의 공존 양식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가해자 인권은 당신들의 보너스 권리다. 약자는 당신들을 가해할 수 없다.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인권과 부덕을 제한하기 위한 인권은 구분되어야 했다. 바닥 세계 인권은 부덕의 면죄부로 작동한다. ‘인권’이라는 개념을 위해 선량한 시민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역설이 합법적으로 묵인된다.


‘자유’를 ‘존엄’하게 사용하는 인간은 몇 없다. 릴스나 숏츠를 보는 자유라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미개함, 인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고작 대한민국 평균 시민이 인류의 최선인 사태를 지켜보며 내 인간 혐오는 보다 공고해졌다. 그런데 노숙인은 혐오로 무성한 내 마음 숲에 동정심의 알뿌리가 살아 있는 것을 물리적으로 일깨웠다.


개성과 존엄성이 동시에 관측되지 않는다는 가정을 세우자 내가 이해되었다. 개성으로 표지된 인간은 존엄하기 힘들다. 어느 대학생의 죽음을 동정하지만,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던 오토바이 운전자의 죽음은 인과율로 읽혔다. 튕겨 날아가던 오토바이 운전자를 볼 때, 나는 영화 같은 장면에 ‘오!’ 놀라워했고, 도롯가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싼 자동차 운전자의 트라우마를 동정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그동안 짜증나도록 시끄럽고 무질서한 ‘개성’이었고, 자동차 운전자는 질서에 내재된 ‘보편 인간’이었다. 존엄성은 익명으로 존재하는 이데아일 뿐, 개성으로 실존하는 순간 사라진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20여 년 만에 공감했다. 타인의 개성은 내 개성과 충돌하기에 지옥이다. 지옥은 물리학을 따른다. 타인에게서 발생한 반발력을 견디는 마음의 물리량의 산수가 존엄성 계수다. 노숙인이 흡연하는 모습을 봤다면, 핫팩을 몰래 선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이타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편 노숙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고, 입자와 입자 사이에는 힘이 있다. 입자와 입자 사이는 크기 대비 태양-지구보다 공허하지만,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의 물리학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이다. 덕분에 미시세계의 거대한 공허로 구축된 거시세계가 미미한 곳까지 만져진다. 존재의 실체는 입자가 아니라 힘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실존을 지탱하는 힘의 정체는 돌고 돌아, 진부하게도, 사랑이인 것이다. 개성과 존엄성을 동시에 존재하게 만드는 초물리적 에너지, 나는 그 힘이 미약해서 개성과 존엄성을 동일시하지 못하는 낡은 미숙아였다. 익명만을 존중할 수 있는 앙상한 동정심이 메리 크리스마스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태는 타당했다.


나의 세상을 소각장으로 만든 것은 나였다. 마음 속에서 타인을 무수히 학살했다. 죽이고 죽이다 보면, 죽이는 것과 죽는 것의 구분이 모호해져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인간 쓰레기더미에 남은 건 쓰레기로 응집된 혐오의 블랙홀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쓰레기의 지평선을 탈출하지 못한 채, 내 존엄성에 칼끝을 겨눈다. 나는 내게, 지나치게 개성이다. 못생겼다. 그날, 노숙인에게 두유를 건네지 못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 ‘쓰레기는 쓰레기통에’의 타당성을 논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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