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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Apr 05. 2024

버려지는 우산들의 색깔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 나는 까만색뿐이었다. 빨갛고 파랄 나이는 아니었다. 장우산과 단우산 사이에서 갈등했다. 뭐가 되었든 찢어짐 없이 튼튼했다. 색깔을 잃고 기능만 남은 우산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신발 젖는 게 싫어서 외출을 자제하지만 기능이 호명되면 나는 별 수 없이 까만색이다.


학원 생활할 때 우산은 생물이었다. 우산꽂이에서 번식했다. 우산의 자손은 크기와 색깔이 달랐다. 학생들은 매주 1회 출석했고, 해가 뜨면 비가 오던 날은 잊혔다. 학원에 두고 간 우산을 다시 찾는 학생은 드물었다. 투명 비닐 우산은 알고도 찾아가지 않기도 했다. 다음 비에는 다음 우산이 있었고, 누군가는 꼭 깜빡했다. 우산은 잊히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맑은 날, 우산꽂이는 창 맞아 죽은 짐승 같았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흉물은 화창할수록 거추장스러웠다. 그림자도 들지 않는 창고로 치워졌다. 우산은 비를 막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버티는 것이 본성 같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비 오는 날을 기다리지만, 비 오는 날 몸에 박힌 창을 빼줄 사람은 없었다. 새 창이 박힐 뿐이었다.


우산은 공공재였다. 수건이나 달력처럼 돈 주고 사면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비가 오면 몇 달 지난 것 중 괜찮은 것을 쓰고 갖다 놓았다. 나도 종종 깜빡해서 우리 집에도 우산이 증식했다. 모인 우산을 학원에 갖고 오면, 동료들은 그냥 쓰지 왜 갖고 오냐고들 했다. 개인 쓰레기를 학원에 갖다 버리는 것 같아 면구스러웠다. 혹은 양심 있는 척했다. 어차피 모두가 한마음임을 알기에 나눌 수 있는 다이얼로그였다. 우산의 주인은 우산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잠깐의 기능에게 애착은 없었다.


처음으로 애착을 가진 우산은 로드숍에서 받은 사은품이었다. 일반 우산보다 조금 큰 까만색 장우산이었다. 까만색 원단에 하늘로 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우산 안 쪽은에 새의 하늘이 펼쳐졌다. 우산을 쓰고 있으면 나 혼자 맑은 하늘 아래 있는 듯했다. 이 우산이 생긴 이후 학원의 흉물들은 쓰지 않았다. 평범하게 조어된 ‘내 우산’이 생소했다. 우산이 마음에 들 수도 있는 건가, 의아함까지 마음에 들었다.


출근길 버스에 두고 내린 적 있었다. 분실물이 보관될지 확신할 수 없었고, 확인된다 한들 종점 사무소까지 가는 일은 번거로웠다. 고작 우산이었다. 비 맞는 시간만 따지면 1년에 12시간 안팎이 될까 말까했다. 이렇게 안녕이구나 했는데, 퇴근 길에 같은 버스 같은 자리에서 ‘안녕’했다. 실현된 낮은 우연은 인연이었다. 그러나 몇달 후 또 버스에서 깜빡했고, 우산의 인연은 번거로움을 무릅쓸 정도는 아니었다. 우산 분실은 기억할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우산은 1년에 12시간 안팎의 필요 때문에 364.5일을 보관해야 하는 비합리적 소유물이었다.


학원을 나왔는데도 출처를 알 수 없는 장우산 두 개가 집에 있었다. 살 하나가 나가고 손잡이가 빠져도 그럭저럭 비는 막아줘서 쓰고 다녔지만 하나는 기어이 물이 새서 버렸다. 우산은 사실상 고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우산 수리 센터가 검색되지만, 무료라고 하더라도 ‘내 우산’의 인연도 흘려 보낸 판에, 그냥저냥 생긴 우산 수리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좀 큰 우산을 갖고 싶은 마음이 질금질금 생겨나던 때였다.


당근마켓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골프우산을 10,000원에 샀다. 운동 삼아 왕복 2시간을 걸었다. 손잡이에 북극곰이 금박으로 새겨진 까만색 우산은 곰 등짝 같은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돈을 주고 산 기억이 있는 첫 번째 우산이자 가장 큰 우산이었다. 백팩이 젖지 않을 정도로 넉넉했다. 시간을 들인만큼 애정했으나 손잡이가 현관 문에 끼어 동강났다. 애정했기에 본드로 붙이고 스카치 테이프를 칭칭 감았다. 매몰 비용이 점점 커졌다. 지금까지 가져 본 우산 중 가장 신뢰하는 우산이다. 아직 잃어버린 적 없다.


2022년 여름, 초경량 3단 접이 양산 겸 우산을 샀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최저가 제품은 아니었다. 여름 내내 휴대해야 해서 구매 기준은 크기와 가벼움이었다. 얼굴을 가려주니 양산으로서 적합했지만, 얼굴만 가려줘서 우산으로서는 부적합했다. 여름에는 늘 양산이었다가 계절 무관 안개비나 는개에는 금박 북극곰을 대신해 우산이었다. 백팩을 앞으로 매면, 이슬비나 가랑비에도 쓸 만했다. 접어서 묶을 때, 우산 원단이 구겨지지 않도록 나름 신경쓰고 있다. 지금까지 가져 본 우산 중 가장 비싸고 편리한 우산이다. 잃어버렸다가 사나흘 만에 인쇄소에서 찾았다.


비 오는 날, 사람들 손에 들린 우산 수명을 가늠했다. 우산의 군집은 쿨톤의 낙엽 무더기 같았다. 쿨톤에서 빠져 나갈 명도와 채도를 알기에 아무리 알록달록해도 소용없었다. 바람 따라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우산은 돈 따라 질서정연하게 휘둘렸다. 이 비에, 신발이 젖는데, 신발이 젖으면 하루종일 찜찜한데, 신발은 자아를 상징한다는데, 신발은 우산으로 덮히지 않는 빗속을 걸어야 했다. 신발을 가려주지 못하는 것이 우산 탓은 아니지만, 우산은 비 올 때 필요한 불완전성이었다. 버려짐과 근친성이 높은 사태가 타당했다.


각자의 일터는 자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간이다. 기능에 충실하면 고단하고, 기능을 잃으면 더 고난해지기에 쿨톤들은 부지런했다. 부지런한 것들의 수명은 우산처럼 알 수 없었다. 9톤짜리 그림자를 가리려면 알록달록하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까만색들이 쉽게 버려지는 것이다. 출퇴근길마다 지나는 술집 귀퉁이에,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쓰던 진회색 통에 우산이 꽂혀 있었다. 대부분 까만색이었다. 까만색을 버리고 당신들도 어딘가에서 까만색을 살고 있을 것이다. 농도 차이는 글쎄다.


아마 늘 있던 우산이었겠지만, 하필 그날 눈에 들어왔다. 날이 흐려 우산 챙겨오지 않은 것이 신경쓰인 덕분에 있지만 없던 것이 비로소 보인 것이다. 쓰레기통에 담겨 있는 것은 쓰레기여야 했지만 보관되는 한 우산은 쓰레일 수 없었다. 우산은 비오던 날 누군가가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비오는 날 누군가가 획득할 행운이었다. 나는 네가 필요했다.


사람의 우산은 역시 사람인가, 조금 낯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일터에서 우산 꽂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나 또한 내게 창을 박아 자아를 피처럼 질질 흘리러 출근 중이었다. 내 우산이 까만색이어도 괜찮은지를 되물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뭐 어쩌라고, 대답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까만색 우산을 쓴다. 당분간 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리봉동에 가는 임 씨의 우산은 까만색이 아니었으면 했다. 쿨톤의 싱싱한 청량감, 당신은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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