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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22. 2024

누군가의 뜨거움이었던 핑크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는 시부터 생각났다. 누군가의 뜨거움이었냐는 물음이 내게 향했다. 나는 누군가의 치열한 떨림이었을까. 전성기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방치되고 만 나는, 너만도 못한 존재겠구나.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보자마자 직감했다. 크린랲에 쌓인 진한 핑크색 너는, 바이브레이터였다.


눈길을 끈 것은 생활잡화였다. 컵, 그릇, 도마, 바구니따위가 무더기로 버려져 있었다. 주워 갈 생각은 없었다. 버려진 생활잡화를 보면 그저 궁금했다. 그것들은 나름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어서 찬찬히 보면 주인이 읽혔다. 가격대를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 동네 살림살이야 뻔했고, 멀쩡한데도 버려졌다면 더 뻔했다. 이번 잡화의 주인은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20~30대 여성이었다. 생활의 흔적이 대량으로 처분된 것을 보면, 나는 습관적으로 고독사부터 생각했다. 본가로 돌아갈 때, 취업하며 이동할 때, 남자친구와 동거할 때, 혹은 기분 따라 그냥 짐이 버려질 수도 있지만, 4년제 대학 2개와 공단을 낀 월세 20만 원 안팎의 동네는 청년 고독사와 잘 어울렸다.


죽은 딸의 바이브이레이터를 버리는 부모의 기분은 상상되지 않았다. 크린랲에 숨겨 버렸다면, 공식적으로는 모자이크 처리되어야 하는 남우세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의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사위로 채워지는 외로움 초라했을 것이다. ‘남우세스럽고 초라한 외로움’은 조합하고 보니 잔인했다. 사람이 없어서 만들어진 외로움이 사람들의 키득거림이 되는 것은 존엄성이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귀한 딸의 존엄성이 바이브레이터로 응축되는 하찮은 슬픔. 이 동네 거주민의 현실적 목숨값인가 싶었다. 부모의 슬픔조차 외로웠다.


내 상상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이브레이터는 진동했다. 며칠 전까지 현역이었던 것이었다. 죽을 사람이 성욕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리 없었다. 오늘의 끝인지, 내일의 예비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느 밤, 대화 이상의 친밀감이 허기진 밤, 인스턴트식품 같은 진동으로 사람을 때웠을 것이다. 여성의 성욕은 남성과 다르다지만, 볼성 사나운 포즈와 분비물로 더러워진 허탈함은 시정마의 허리 놀림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외로움의 배설물을 치울 때, 우리는 딱 그 정도의 인간이었다. 그래도 진동은, 생의 의지였다.


생의 의지는 잘 관리된 모양이었다. 크린랲을 열었을 때 세재 냄새부터 풍겨 왔었다. 손 때도 타지 않았다. 청결하게 기약된 다음이 끝장난 이유가 특수 기능 고장은 아닌 듯했다. 버튼은 온/오프로 단순했다. 강도가 조정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고장난 건 사용자 쪽이었을 것이다. 싸구려 진동으로 충족되지 않는 외로움을 고장으로 정의하면 서글프지만, 정상으로 단정하는 것도 애연했다.


연애로 해결될 문제였으나 연애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이브레이터를 구매할 정도면 연애 공백이 짧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애 시장에서 갑은 여성이었다. 수컷이 들이대고 암컷이 선택하는 매커니즘은 생물학적으로 타당했다. ‘주변에 여자가 없다’의 여자는 염색체를 의미했지만, ‘주변에 남자가 없다’의 남자는 ‘사귈 만한’을 함의했다. 바이브레이터를 구매한 여자의 사연은 바이브레이터만 못한 남자들밖에 없는 상황 때문인지, 연애 시장에 참전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품성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진동형 생의 의지는 구차하고, 처절했다.


암컷과 수컷 각자의 결핍은 상호보완되므로 물물교환은 어렵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연애는 우월한 종간 상호연대가 되었다. 미혼율은 2000년에는 30대 13%, 40대 2.8%였으나 2020년에는 30대 42.5%, 40대 17.9%였다. 2024년 3월 세계일보 정정 보도에 따르면 미혼, 기혼을 합쳐 2030세대 모솔은 21%였다. 연애 공백기가 긴 사람들까지 감안하면 시대가 경제대공황 수준의 불구였다.


시대는 연애시장에서 개인의 자기검열을 강화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를 찍는 것은 범죄이므로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도 보지 말아야 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모욕이 될 수 있으므로 불확실성에 대한 고백은 매너 없는 짓이었다. 연애 최소 자격은 SNS 속에서 높아져 갔고, 예의 바른 개인은 얌전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 성선택을 받지 못한 불구의 성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혼자 구질구질하게 생물학을 해결했다. 잘나고 예쁜 사람들만의 특권적 생활사, 연애였다.


경제 대공황은 정부 개입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개인의 내밀한 문제로서 신자유주의 이상이 실현된 연애 시장에, 정부가 개입할 명분이 없다. 연애시장의 국가 단위 침체는 미시경제학도, 거시경제학도 답을 내지 못하므로 국가의 자발적 멸종으로 귀결되는 중이다. 바이브레이터로 자신의 생물성을 자각하는 희귀종, 연애-결혼 시장에서 스스로 도태된 한국인이다.


바이브레이터가 있는 한, 외로움은 마비시킬 수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진동이 아니라 떨림이지만, 진동은 떨림을 대체한다. 떨림에 체온이 더해진 설렘을 합성하는 방법을 잊었 다면 고장난 인간이다. 버려진 건 바이브레이터일까, 바이브레이터를 버린 사람일까?


나는 확실히 고장난 쪽이다. 바이브레이터가 필요없었다. 설렘도, 떨림도, 진동도 없는, 제세동기의 일직선 그래프 같은 평온만이 유효하다. 그래서 당신이라도 새 바이브레이터를 샀으면 좋겠다. 바이브레이터를 마사지기 정도로 생각할 만큼 마음이 단단해지고 나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바이브레이터는, 설렘을 향한 최소한의 기갈흔(痕)이다. 기갈의 힘으로, 당신의 새 바이브레이터가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내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흔(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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