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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n 28. 2024

나한테 바나나

그럴 리가. 이렇게 띵띵한 몸뚱이에.


바나나는 다이어트 식품이 아니다. 중간 크기 하나에 105칼로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나나를 한두 개만 먹을 줄 모른다. 껍질을 벗기다 보면 어느새 서너 개다. 이왕 이렇게 된 관성이 한두 개 더 은근슬쩍 한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 앞에 보이므로 먹는다. 입이 심심해서 먹고, 손이 심심해서 먹고, 자기 전에 잠에게 에피타이저로 바친다. 바나나는 끼니를 대리하지 못하고, 하루 4~500칼로리 잉여 칼로리만 쌓는다.


내 습성을 알기에 다이어트 시기에 어지간하면 바나나를 사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 때도 잘 사지 않는다. 바나나는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 쓰레기 버리기 귀찮아서 사과나 배도 물에 씻어 껍질째 먹고, 포도도 껍질뿐만 아니라 씨까지 다 먹는 내게, 바나나 껍질은 중대 사안이다. 바나나 껍질의 쓸모는 카트라이더로 제한적이고, 나는 면허를 반납한지 오래다. 마트에서 내 카트는 바나나 매대를 그냥 지나친다.


바나나는 취향이 아닌가? 그럴 리가. 요시모토 바나나를 그럭저럭 선호했고, 편의점에서 2+1 하지 않는 음료 중 제값 주고 사 먹는 건 빙그레 단지형 바나나 우유가 유일하다. 기본적으로 과일을 좋아한다. 특히 바나나는 귤과 더불어 가장 간편한 과일이라서 좋다. 껍질 처분의 귀찮음도 사실 세척과 칼질을 생략해도 되는 간편함으로 상쇄된다. 그저 과일 자체를 잘 사지 않아 바나나와 거리가 멀어졌을 뿐이다. 가끔 과일을 살 때, 바나나일 확률이 절반은 된다.


바나나는 한 때 황제과일이었다. 물 건너 온 것들이 모두 비싸던 시절이 있었다. 노랗고 삐죽삐죽한 게 생긴 것부터 왕관을 닮았다. 부자집 식탁에나 어울려서 햄버거, 피자를 동경하듯, 이국의 과일을 동경했다. 귤도 껍질을 까 먹었지만, 바나나 껍질을 까 먹는 건 칼로 돈가스를 썰어 먹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바나나 가격은 가장 낮은 계층까지 떨어졌다. 바나나 껍질을 까 먹는 건 동물의 왕국에서 종종 봤다.


이제 바나나는 사실상 국민과일이다. 유일하게 한결 같은 값으로 1년 내내 과일 코너 매대를 지킨다. 다문화 시대를 반영하는 달달한 터줏대감인 셈이다. 대감님은 곁방살이를 하지 않는다. 마트 매대 진열 공식이라도 있는지 과일은 대체로 입구 가까이에 있고, 바나나는 과일 매대 시작부에 넓게 위치한다. 순환 주기도 빨라 직원이 바나나를 포장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봤다. 저렴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나나 과실 무게와 바나나 껍질 무게 비가 1:1에 수렴해 바나나에 지불하는 비용이 부당하더라도, 바나나는 여전히 과일 가성비의 왕이다. 현재 5,000원 이하로 살 수 있는 과일은 귤이나 방울 토마토 정도다. 5,000원 단위의 귤이나 방울 토마토는 입가심 선에서 정리되므로 한국의 푸짐한 정은 바나나가 계승했다.


마트에서 물크러진 것들만 모아 반의 반 값도 안 되는 가격에 팔 때, 정은 절정이었다. 나는 이 거친 정에 못 이겼다. 그래서 내 바나나는 20년 이상 짙은 표범 무늬였다. 정 많은 바나나는 한 끼를 대체하고도 남을 양으로 포장되었다. 눈에 띄는 대로 샀다. 과일을 섭취하는 거의 유일한 은총이었다. 하루만 지나도 날파리가 꼬였다. 아니, 비닐을 뜯는 순간부터인지도 몰랐다. 내게 바나나가 있는 풍경은 시계가 흘러내리고 개미가 기어다니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같았다. 정의 실존양식은 흘러내리지 않은 노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역설되었다. 쫓기듯 바나나를 먹고 있을 때 노란색이 먹고 싶었다.


마트에서 물크러진 바나나 묶음이 사라지자 1-2년은 바나나 없이 살았다. 살아봐도 달리, 문제되지 않았다. 고작 바나나였다. 그러나 점점 귤이었고, 포도였고, 수박이었고, 참외였고, 토마토였고, 감이었고, 사과였고, 배였다. 바나나가 열리지 않아 과일 전체가 닫힌 것이다. 생활의 윤기가 퇴색되는 정도는 대수롭지 않았다. 어차피 윤기는 사물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은 말투로 역습이 들어왔다. 본질뿐인 사물은 원자 단위의 물리학으로 귀결될 텐데 괜찮으신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 미시세계의 법칙이 별 수 없이 괜찮지 않아서 윤기와 생기의 근친성을 인정했다. 인생이 B만과 D지는 것 사이의 Chichen 혹은 Cibal이 되는 사태는 물리적었다. 디룩디룩 엔트로피가 쌓이는 C의 물리학은 시시하다.


요즘은 동네 마트에 물크러진 것을 팔지 않았다. 노란 바나나는 놀랍도록 단단했다. 비로소 왕관 같았다. 많이 사면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5천원 미만짜리만 샀다. 노랑이도 다 익기 전에 다 먹었다. 단단한 것은 덜 달았으나 씹는 느낌 덕분에 슬쩍 끼니를 닮아 있었다. 간혹 다음 밤까지도 남아 있었다. 주로 자기 전에 저지방 우유와 먹었다. 단단한 바나나를 씹고 우유를 마신다. 입 안에 오래 머금어 1인용 바나나 우유가 완성되면 삼켰다. 수면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과일을 먹었다’를 먹었으면 충분했다.


바나나는 섬유질이 많아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식욕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바나나의 사실은 내 사실이 아니었다. 포만감은 ‘약한 사실’이고, 당분의 중력은 ‘강한 사실’이었다. 바나나는 바나나를 끌어 들여 내게 다이어트 필패 음식이다. 그러나 백색 정체 탄수화물 섭취 줄이는 고육지책으로 나쁘지 않다. 맛있는 명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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