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색깔이 있다면 초록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는 그렇다.
자취방에는 아무도 없어서 갑갑했다. 형광등을 환하게 켜 놔도,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려도, ‘없다’만 보였다. 1분이 한 시간 같은 저밀도의 존재감에 나는 원룸 기본 옵션으로 달린 가구가 된 듯했다. 현대적인 물아일체의 시간 속에서는 시멘트 맛이 났다. 애완견이라도 기르고 싶었지만 내가 밖에 있는 동안 녀석이 나 대신 시멘트를 핥게 만들 수는 없었다.
분명, 나는 개를 기르고 싶었는데 방에는 화초가 늘어갔다. 토피어리, 랜디, 나비란, 다육 식물 3종, 테이블야자, 워터코인, 허브 타임에 강낭콩까지 있었다. 토피어리를 빼면 모두 내 손으로 분갈이를 했다. 워터코인은 어쭙잖게 수중재배를 시도하다가 죽였지만 방에 난 남쪽 창에는 토피어리, 랜디, 허브 타임, 강낭콩이, 부엌에 난 서쪽 창에는 한 화분에 심긴 다육 식물 3종이, 책상에는 나비란과 테이블 야자가 잘 자랐다. 1+1 행사 사은품처럼 덩달아 나도 잘 살았다.
하루는 듣지 않는 라디오를 켜 놓고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급한 작업을 끝낸 직후여서 멍하게 있어도 좋을 때였다. 보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았다. 단, 심심한데 외롭지 않은 것이 새삼스러웠다. 화초들은 방에 그득한 ‘없다’로 광합성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내가 초록에 물을 주고 빛을 쬐어주는 한, 방에서 시멘트 맛은 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화초에 눈이 갔다. 한 데 모아, ‘안 외로움 기념’ 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 위에 화초들을 모아 놓고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좁은 책상에 모아 놓고 보니 제법 그럴 듯해 보여서 엄마 생각이 났다. 사진을 MMS로 전송했다.
- 나도 좀 되제? 이거 보니 내가 엄마 아들 맞는갑다 싶으요.
본가 베란다는 폭 1.5m에 길이는 6m 남짓 된다. 양 끝에 세탁기 자리와 수납공간이 있고 남쪽으로 난 전신 창은 폭이 4m쯤 된다. 온실과 매 한가지라서 겨울에도 창을 살짝 열어두지 않으면 한 낮의 베란다는 더울 정도다. 창을 따라서는 화초들이 빼곡하다. 화초들이 선반 위에 층층이 자리 잡고 있어 창은 초록 치마를 두른 것 같다. 나는 이곳을 영자 식물원이라고 부른다.
5년 전 초봄에 이곳으로 이사 올 때는 동사 직전의 행운목 한 그루뿐이었다. 행운목은 이사 전에 주전자 물이 어는 거실에서 혼자 겨울을 났다. 제법 무성했던 입이 다 떨어지고 두세 개 남은 잎도 누렇게 시들어 있어 엄마가 버리려고 했던 것을 내가 억지로 챙겨왔었다.
그 당시 행운목이나 엄마의 건강상태는 도토리 키 재기였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엄마와 반목하던 아버지는 생계비를 내놓지 않았다. 방에도 보일러를 돌리지 않았으니 거실에서 행운목이 얼어가는 것은 당연했고, 아버지가 언제 또 폭력을 쓸지 모른다는 불안에 엄마는 수축기 혈압 200을 넘기고 앞머리는 듬성듬성 빠지셨다. 별거를 틈타 이곳으로 온 것은 이사가 아니라 도피였다.
엄마는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 소문을 타게 될까봐 바깥출입도 못하셨다. 13평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살다가 24평 임대 아파트를 혼자 지키다보니 외롭다고도 하셨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집에 컴퓨터를 들이고 인터넷을 깔았다. 인터넷 고스톱은 잠과 잠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로 엄마의 그 해 봄을 채웠다. 그렇게 시간을 지우고 맞은 여름, 행운목에 풀빛이 돌았고 엄마의 앞머리에는 숱이 더해졌다.
그 즘부터 엄마는 화초를 사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개념으로 빈 곳을 채우려고 사셨다. 거실을 채우고 나서는 물건을 쌓아둔 베란다에 공간을 만드시고 그 곳에 화초를 내셨다. 아아따, 아줌마요, 자리도 없는데 와 그리 자꾸 사노? 알았다. 이제 그만 살끼다. 진짜 자리도 없다. 2년여 전부터 이런 대화가 오갔지만 내가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화초는 하나씩 늘어나 있었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보고 있으면 설거지를 끝낸 엄마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새로 핀 꽃을 봤냐고 물으신다. 넌지시 내미는 어투는 예쁘게 잘 키워냈다는 자부심으로 밑동이 든든했다. 나도 집에 들어오면 옷을 갈아입자마자 화초를 둘러보는 편이라 엄마의 말에 쉽게 길을 터드렸다. A는 꽃은 안 피고 키만 크기만 해서 또 줄기를 쳐 주었다는 둥, B는 햇볕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자리를 바꿔봤다는 둥, 게발 선인장에 핀 꽃을 보러 동네 아줌마들이 다녀갔다는 둥, 내가 없는 동안의 화초 성장기를 줄줄이 읊으셨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얼굴에도 꽃이 피셨다.
요즘, 엄마의 앞머리 숱은 회복되었고 혈압도 일반 고혈압 환자 수준으로 나름 안정된 편이 되었다. 행운목은 그 해 겨울이 세포 깊숙이 세긴 한이 되었던지, 제 무게를 못 이겨 꺾일 정도로 풍성한 잎을 냈고 녹색은 여름을 움켜쥘 듯이 진했다. 키도 내 허리께에 닿았다. 엄마는 행운목 잎사귀의 먼지를 닦으시며 말씀하시곤 했다. 야는 내랑 같이 가는 기라. 다행히, 행운목의 수명은 십장생과 호형호제한단다.
문자 메시지를 보낸 후 거의 바로 전화가 왔다.
“멀 그리 많이 샀노? 니 방에 그거 놓을 공간은 되나?”
“어허이…… 그쪽만 하겠소?”
“아이고 별시러브라.”
“아줌마 피가 어디 가겠나?”
“니 내 보고 계속 산다고 뭐라 하지 마라.”
“내가 몇 개나 샀다고. 나도 이제 그만 살라요.”
“밥은 먹었나?”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나는 전화상에서 항상 잘 먹고 있다.
책상에 모아 놓은 화초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요즘은 강낭콩에 제일 눈이 간다. 자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자랐다. 첫 번째 본 잎이 아기 손바닥만 했고 지금은 두 번째 본 잎이 손가락 마디만 하게 자랐다. 잎사귀의 그늘에 가려 시들어서 말린 떡잎에서 엄마가 거쳐 오셨을 가슴 풍경을 본다. 나보다 더 큰 빈방을 더 오랜 시간 견디신 엄마. 이제는 본 잎으로 풍경을 옮겨가 가을에는 콩을 맺었으면 좋겠다. 올 가을에는 그 콩으로 밥을 지어 먹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