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태어나다’와 ‘죽다’ 사이의 괄호 속 이야기이다. 괄호를 여는 것도 괄호를 닫는 것도 내 의지는 아니지만 괄호를 채우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다. 커서가 움직이는 속도감 때문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스페이스 바만 눌러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괄호 속을 채우는 띄어쓰기는 삭제일까 쓰기일까. 인생의 잔혹함은 그것을 발견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전자라고 답을 하면서도 멈추는 순간 괄호를 닫아야 할 것 같아 스페이스 바만 눌러대는 것이다. 일단, 익숙하다.
지갑을 열었을 때 바로 보이는 투명 비닐 칸이 비어 있었다. 보통은 가족사진, 애인사진, 친구사진 등 누군가의 얼굴 하나를 품고 있을 자리였다. 지갑의 본질이 현금과 카드를 보관하는 일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늘 필요한 만큼 현금을 가지고 다녔고 정지 먹은 카드도 없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카드를 꺼내야 했고, 식당에 가서도 계산을 해야 해서 나는 그 공백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했다. 비어 있는 자리를 뻔히 보고서도 비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가 지갑의 출처가 왼쪽 안주머니이고 그곳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내 오래된 결핍이 보였다. 내 신분증이 지갑 안쪽에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힌 채로 꽂혀 있는 것도 그 이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없다’는 미니 홈피에서도 선명했다. 대문에 걸어 놓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에서 가지고 올 말도 없었고, 미래에게 바라는 말도 없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뿐인데 모니터에 건넬 말은 없었다. 모니터는 밀리지 않는 벽처럼 버티고 서서 내용을 요구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로 확인 버튼을 누르자 “내용을 입력하세요.”가 팝업창으로 튀어나왔다. 졸지에 미확인 비행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 위에 ‘내용을 입력하세요.’라고 따라 썼다. 쓰고 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가지고 싶었다.
미니 홈피를 닫을 즘 스마트 폰을 사서 카카오톡을 하게 되었다. 카카오톡 속에서 나는 무슨 말이든 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대화를 걸어왔고 가만히 있다가 누군가에게 대화를 걸었다. 대화 내용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명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카카오톡의 사진과 상태 메시지에도 남길 것이 없었다. 물론 아무 설정을 안 해도 되지만 얼굴과 말로 채워진 친구 목록에 내 자리만 비어 있는 것을 보면 내가 묽어지는 것 같았다. 기어이 사진을 정하지 못했지만 말은 했다. - 내용을 입력하세요.
내 내용이 없어서 하루에 두세 번씩 다른 사람의 내용을 훑어봤다. 한 번 정해놓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사람도 있었고 자주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현재를 이야기했다. 꽃님이는 ‘간다그 인사해줘’에, 장땡구리는 ‘입원합니다. 대화는 3/3할까요? 문자O카톡&전화X’에, 최 부원장님은 ‘매일 즐거워^^’에, 윤성이는 ‘8반’에, 서준이는 ‘잊는 연습’에, 손나는 ‘정리 중-미련 없이 버려’에, 미정이는 ‘이젠 혜화여고생’에 희경이는 ‘울컥’에, 연지 누나는 ‘아름다운 소통, 함께 하는 문화’에, 해수는 ‘전기처럼 찾아와 먼지처럼 사라져’에, 우희쌤은 ‘해품달 완전 조으다♥’에 김쌤은 ‘늘 같은 일상’에, 경진이는 ‘대학생준비완료:-]’에, 세득이는 ‘아오~~스트뤠~쓰!’에, 서영이 누나는 ‘마라톤 하프코스....도전!’에, 채현이는 ‘아프닥!’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괄호를 채우고 있었다.
혹은 살아가기 위한 다짐이나 희망을 피력함으로써 괄호의 색깔을 명시하기도 했다. 민기는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태겸 씨는 ‘충전 만땅 제대로 한 번 미쳐보자!’를, 나율이는 ‘Live is Love’를, 지율쌤은 ‘어린이의 마음’을, 연우쌤은 ‘쿨하지 않게 보일까봐 걱정하면서 살 필요 없다.’를, 서린이 어머님은 ‘끈질긴 믿음-Relentless’를, 교준이 어머님은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를, 유리쌤은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를, 은지쌤은 ‘끝이란 존재하지 않아, 멀리 있을 뿐이지’를, 수영이는 ‘이제 다시 ♡ 내 시대가 온다네’를 동력으로 살아갔다.
나는 저 몇 마디가 써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약간의 글을 쓰거나 수업 준비를 하고 학원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는 인터넷을 헤매다가 잤다. 월요일 하루 쉬었는데 업무는 주말에 몰려 월요일 아침에는 콘푸로스트를 먹어도 호랑이 방귀 뀔 기운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월요일에는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서 집에서 약간의 글을 쓰거나 수업 준비를 하고 화장실에서 똥을 누고 인터넷을 헤매다가 잤다. 집-학원의 사이클에서 건져지는 것은 월급이 전부였다. 내 한 달은 통장에 일곱 자리 숫자를 찍기 위한 무기물처럼 조용했다.
밥벌이 자체가 지겨운 것은 아니다. 가르치는 일은 즐거운 일이고, 다른 과목도 아니고 하필 논술이라는 것도 적성과 맞아 떨어진다. 문제는 생계와 생활의 불일치가 아니라 시간의 속도다. 음악인으로만 살아가는 서태지조차 사실은 정현철의 일부다. 정현철은 서태지의 속도를 조절하지만, 내 생계의 속도는 내가 조절할 수 없다. 화요일에 출발은 같이 해도 생계는 다급해서 힘껏 뛰고, 생활은 생각을 더듬으며 천천히 걷는다. 시간이 갈수록 생계와 생활의 격차는 벌어지며 서로가 서로를 대상화한다. 객체들의 속도전으로 주체가 분열되는 것이다. 생계는 뒤처지는 생활이 안타깝고 생활은 생계를 좇아가기 힘겹다. 일요일에 막판 스퍼트를 낸 생계가 월요일에 쉴 때, 생활은 가까스로 생계를 따라 잡아 섞이지 않는 조우를 한다. 섞이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금방 화요일이다.
생계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로또를 사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5,000원어치씩 자동으로 긁었다. 아우디를 타고 싶은 것도 아니고, e-편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노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원룸에 살면서 주3일 근무 정도의 느슨한 노동을 하고 싶다. 햇살 좋은 날 벤치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먼 곳의 조급함을 의식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생활에 생계를 품을 수 있을 때 ‘나’라는 주체성도 회복될 수 있고, 주연이 확정되어야 서사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지갑을 열었을 때 바로 보이는 투명 비닐 칸에 로또를 넣어 다닌다.
로또 1장이 1등에 당첨될 확률 : 0.000012%
로또 5장이 1등에 당첨될 확률 : 0.000061%
1년은 52주, 1년 안에 1등에 당첨될 확률 : 0.003194%
이렇게 매 주 샀을 때 50년 안에 당첨될 확률 : 0.159705%
내가 50년 동안 행복하지 않을 확률 99.8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