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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17. 2024

김밥의 속도

김밥 맛이 사라졌다. 풍성해진 재료는 몸값만 불렸다. 김밥 탓이 아니다. 세계가 너무 빨라졌다. 세계는 김밥이 지닌 휴대성의 속도를 넘어섰다. 속도가 입 안에서 잠시 우걱거리다 사라지는 것을 ‘먹다’로 지칭한다.


그날, 택배 기사의 입 안에도 허기를 에우는 속도가 득실했을 것이다. 골목 귀퉁이에 주차된 1톤 택배 트럭 운전석에서 그는 김밥을 먹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은박지로 포장된 김밥을 쥐고, 다른 손에는 택배 영수증을 쥔 채였다. 은박지는 반만 벗겨 김밥은 한 토막씩 베어 물었다. 영수증을 확인하는 중에 김밥을 먹는 것인지, 김밥을 먹는 중에 영수증을 확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 먹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버거웠다. 삼켜지는 것은 세계의 속도를 일탈하지 않기 위한 안간 힘임을 안다.


“먼저 기름 넣고 올 게요.”

맥락 없는 농담을 다른 강사와 행정 직원들이 알아들었다. 나는 학원 옆 김밥집에서 2,000원짜리 김밥 한 줄을 사와 빈 강의실에서 혼자 먹었다. 강의 시작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만 첨삭 끝나는 시간은 고정되지 않았다. 일부러 시간을 잘라내지 않고서는 그나마의 짬도 나지 않는다. 김밥을 마는 시간과 먹는 시간이 다르지 않아, 나는 주유(注油)중이다. 주유가 끝나자마자 나는 또 수업을 달려야 한다.


깨끗하게 지워진 칠판을 보며 먹는 동안 두 개의 다른 풍경이 갈마들어 동아줄처럼 꼬인다.


초등학생 시절, 소풍날 아침에 엄마는 김밥을 만드셨다. 햄, 맛살, 계란, 단무지, 시금치, 오이, 당근이 들어갔다. 나는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엄마의 김밥 마는 모습을 지켜봤다. 엄마는 느긋하되 확실해서 신속하되 급하지 않았다. 내가 먹을 김밥들이 엄마의 손에서 마술처럼 만들어졌다. 차곡차곡 쌓이는 김밥을 보고 있으면 편안했다. 침이 고였다. 아버지가 먼저 드시기 전에 꽁다리라도 얻어먹을 때면 팔랑대는 강아지꼬리처럼 조용히 신났다. 김밥은, 잘 먹지도 않는 삶은 당근까지도 맛있었다.


엄마의 다른 편에서, 김밥집 아주머니는 김밥을 조립하셨다. 요즘 김밥에는 당근 대신 우엉이 듬뿍 들어갔다. 우엉은 짭쪼름하게 간을 맞추면서 김밥의 두께를 5cm 가까이 키웠다. 손아귀에 가득 차는 두께를 다루는 아주머니의 솜씨는 능숙하되 다급했다. 줄지은 대기자와 주문 전화의 속도를 손으로 다 받아낸 탓이었다. 누가 먹을지 모를 탄수화물의 생산을 보고 있으면 김밥은 침의 일이 아니라 아밀라아제의 일인 것 같았다. 능청스러운 척하는 아주머니의 속도가 위태로웠고, 나의 기다림이 초조했다.


[김밥천국]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김밥은 분명천국의 음식이었다. 중학생 때는 매점에서 파는 300원짜리 김밥에도 난자에 몰리는 정자떼처럼 달려들었다. 김밥만이 생명인 듯했다. 김밥 속은 단무지와 흔적뿐인 햄 한 줄기가 고작이고, 크기는 손가락보다 약간 더 긴 정도였다. 김밥의 어설픈 흉내조차 쉬는 시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라도 먹어야 할 가치가 있었다. 대학 시절의 700원짜리 삼각 김밥은 ‘어쩔 수 없는 에너지 바(energy bar)’였다. 가난한 주머니가 허락하는 선택지가 비좁아 1,200원짜리 커플세트나 음료가 딸린 것이 곧 취향이었다. 그러나 참치마요, 고추장불고기, 숯불갈비, 고기김치 등 맛의 선택지는 허용되었다. 매 끼니에 기대할 맛이 있어서 미각이 유효했다. 양이 적어서 빨리 먹게 되었지만 다급한 적은 없었다.


[김밥천국]이 등장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김밥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소풍날이 아니어도 소풍처럼 먹을 수 있음이 좋았다. 김밥은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된장찌개나 햄버거처럼 식사 메뉴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간편성 때문에 김밥은 바쁠 때 어쩔 수 없이 먹는 ‘에너지 바’가 되어갔고, 논술 강의가 바빠질수록 김밥이 먹고 싶은 날은 1년에 단 하루도 없어졌다.


먹고 싶은 적 없는 김밥을 뱃속에 밀어 넣으면서 내 연비를 생각한다. 차가 먹는 ‘불스원샷’처럼 나는 ‘스트랩실(인후염 트로키)’을 빨아주면 나는 더욱 맹렬하게 강의를 달려낼 수 있다. 2,000원짜리 김밥 한 줄로 여섯 시간을 노동한다. 2,000원어치의 가솔린으로 자동차가 20km를 달리므로 시속 4km로 여섯 시간에 24km를 걸을 내가 더 낫겠다. 6시간의 자동차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고도 남는 것을 감안하면 부산에서 시작한 내 여섯 시간은 개성에 있을지 평양에 있을지, 말도 안 되는 산수에 쓴 웃음이 지어진다. 택배 기사와 김밥집 아주머니도 최저시급 근처에서 무참한 연비를 달리는 중일 것이다.


예전보다 돈은 더 벌어 편의점 삼각 김밥을 먹을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돈을 버는 속도 속에서 김밥 맛이 사라진다면 그 속도로 버는 돈은 뭘까? 장시간 수업의 하중을 몸이 버티지 못했다. 목이 망가져 도라지배즙과 스트렙실을 달고 살았고, 무릎이 약해져 어지간하면 뛰지 않았다. 몸을 헐지 않으면 몸을 보존할 수 없게 된 현대 세계의 속도가 힘들다. 마지막 김밥을 입 안에 우겨 넣고 씹는 채로 앉은 자리를 정리한다. 아직은 이 속도를 버티는 성대와 위장에 미안하고, 감사하면서 동아줄 같은 넥타이로 목을 죈다. 수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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