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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우영우 나무

시간이 곧 힘이다

by 하루오

네가 어린 시절, 너도 또래가 있었겠지? 걔들은 다 어디로 간 거냐? 어쩌다 지독히도 묵묵하냐. 네 나이가 얼만데, 자식 하나쯤은 있어야지. 혹시 대임지구 공사 중인 길가에 뿌리 뽑힌 작은 버드나무가 네 자식이려나?

너는 우리 동네 고분군 아래 혼자 우뚝 선 우영우 나무다. 줄기가 내 두 아름이 넘는다. 정식 명칭은 모른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본 뒤, 내 멋대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너를 감싼 울타리 하나 없는 걸 보면, 애초에 네 이름이 있었을 리도 없겠다. 나 역시 한 번도 너를 소리 내어 불러본 적이 없으니, 너는 아직도 네 이름을 모른다.


30년, 혹은 50년 전에는 당산나무였을지도 모르겠다. 너를 중심으로 농가가 듬성등성 흩뿌려져 있었다. 당산나무는 보통 마을 초입이나 마을 중심에 있다지만, 너는 마을 안쪽에 있었다. 네 자리에 서면 좌우로 마을의 흔적이 내려다 보였고, 뒤로는 고분군의 언덕이었다. 지금은 원룸단지가 조성되며 뒤로 돌아가는 길이 생겼지만, 30년 전쯤에는 길이 없었을 것 같았다. 너는 멀리서도 보이는 마을의 등대이자, 마을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폐쇄된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노인정 앞에 노인분들이 종종 담소를 나누고 계셨지만, 그분들께 네 사연을 여쭙기에는,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나는 영원히 네 역사를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너를 보고 자란 사람이 이제 몇이나 남았을까. 농가는 줄어들고, 원룸단지는 영역을 넓혀왔다. 정체만 간신히 이어가던 농가는 대임지구 공사로 숨통이 끊겼다. 노인이 사는 집은 있으나 농가는 없어졌다. 노인정은 마을 중심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노인정은 원룸단지 경계에 덩그렇다. 노인정 오른쪽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사셨었다. 낮은 담 안 쪽에 모아 놓은 폐지가 보였었다. 폐지가 안 보일 무렵, 할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생사 여부는 모른다. 네 눈 아래서 벌어진 일이니 너는 알고 있을지 몰라도, 나는 네 말을 들을 길이 없다. 노인정 왼쪽의 편의점은 24시간 깨어 있더라도 알고 있는 게 없을 거다.


지금 너는 임당 고분군 거대 문지기다. 사실 너도 울타리를 두르긴 했다. 고분군에 울타리 두르면서 너도 덤으로 포함된 듯했다. 너와 고분군 사이의 고분군 입구는 늘 열려 있다. 네가 어렸을 때는 고분군 근처 여러 나무 중 하나였겠지만, 네가 몇 백 년 단위로 제법 육중해졌으니 고분군의 2,000년 옆에 설 만했다. 너는 살아 있는 것 중에 가장 늙었지만, 죽어 있는 것 중 가장 젊었다. 죽은 것들의 막내는 매년 싱싱히 푸르렀다.


너를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너는 이곳 주민 생활 동선 바깥에 있어, 마음먹어야 찾을 곳에 위치했다. 입구 앞 공터에 주차 공간이 있었지만, 너는 굳이 찾아와 볼 만큼 특별한 한 그루는 아니었다. 와, 크다, 1분쯤 서성이고 나면 할 게 없었다. 바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거닐수라도 있었지만, 네가 거느린 풍경은 꽤 트여도 경산을 넘지 못해 바다에 견줄 수 없었다. 앞과 왼쪽에 도로가 닦이며 너는 더 풍경이 되어버렸다. 도로는 새로 생긴 길인지, 원래 있었던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우체국이나 남매지 갈 때, 다이소 들렀다가 집에 올 때 네 곁을 지나칠 뿐이었다. 두세 번, 네게 간 적 있었다. 종이 박스를 챙겨가 바닥에 깔고 앉아 책을 읽었다. 바람에 나뭇잎 사각거리는 소리가 쏟아지는 낭만보다, 수시로 기어오르는 개미가 훨씬 실제적이었다. 허벅지 위의 개미를 조심히 튕겨낼 때,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떠올렸다. 너라면, 엿가락처럼 흘러내리는 시계를 통째로 빨아 먹고 굳건할 것 같았다. 내가 오후 2시 40분일 때, 네가 몇 시일지 궁금했다. 나는 네 시계가 정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정적으로 가능하다면, 너를 구매하고 싶다. 중형차 한 대 값만큼의 진심이다. 차는 관심도 없고 필요도 없지만, 너는 다르다. 너로 뭘 하겠다는 건 아니다. 나보다 오래 살았고, 나보다 오래 살 확신이 내 것이면 좋겠다. 그 아래 벤치를 설치해 책을 읽다가 낮잠이나 자고 싶다. 미안하지만 그 벤치는 나만 쓸 거다. 개미가 못 올라오게 주변에 약은 좀 칠 거다. 반대편에 과자 부스러기 뿌려주면 나름 상생일 것이다. 심심하면 별 의미 없이 금줄을 치고, 금줄에 오방색 비닐봉지에 책을 넣어 매달아 놓고 싶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편안히, 너는 내 거 하고 싶다.


아니, 지금껏 그랬듯 아무 것도 안 할 거다. 일부러 찾지도 않을 거고, 스쳐지나가며 안녕 정도만 나눠도 된다. 그냥 내 것이 내 방 근처에 우뚝하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너는 존재가 곧 가치다. 네가 우뚝 지켜온, 시간의 힘이다.


나는 인근 네 또래를 알고 있다. 자인시장 방향으로 자전거로 40분쯤 달리다보면, 논밭 사이에도 버드나무 한 그루가 우뚝했다. 그 녀석은 벤치 몇 개와 정자가 있는 작은 체육 공원을 거느렸다. 정자 아래에서 [육식의 딜레마]를 읽었다. 금호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 하양 방면으로 80분쯤 달리다 보면, 강둑에도 네 또래가 우뚝했다. 그 녀석은 그네 벤치 두 개를 거느렸다. 그네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김훈의 [허송세월]을 읽었다. 너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도 너는 아무것도 거느리지 못했다. 나는 도보 5분 거리인데도 너를 찾지 않았다. 네 아래에서 뭘 읽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고분군을 끼고 있는 수 백 살짜리 버드나무가 전세계에 몇 그루나 있을까? 너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특별해질 거다. 죽기 직전까지 매일매일 가치가 올라가는 네가 퍽 부럽다. 그런 네가 사람들에게서 방치되는 것은 내게 다행이지만 퍽 부당하다. 대임지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너는 더 이상 이 동네 등대 노릇도 못할 것이다. 네가 풍경조차 되지 못할 때, 내가 좀 외로워질 것 같다. 아니, 짜증이려나. 너를 정리하고 보니 말이 안 되지만, 너는 내 심리적 자식이다.


봄, 가을 날 좋을 때 네 아래서 책이라도 읽을 계획을 늘 미뤄왔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라도 끓여 오면 거기가 바로 맛집일 텐데도 너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같이 있어서 가치가 절하된 사태는 나와 나 사이면 이미 충분한 거 아닌가. 올 가을, 너는 네 이름을 알게 될 거다. 그날은 정말, 일 없이, 펜 없이, 태블릿 없이, 책만 읽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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