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로 모른 척해주는 예의, 다종교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종교

by 하루오

저녁이 되면, 강산애 아파트 사거리는 다종교 전시장이 된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 수염 부슬부슬한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인 이곳은 어느 이슬람 동네다. 건너편에 매대를 세우고 잘 차려 입은 남녀 서넛이 서 있는 것이 신천지인지, 하나님이 교회인지, 여호와의 증인인지, 혹은 내가 모르는 신흥 종교인는 확실하지 않다. 잘 차려 입은 누군가는 심리나 설문 조사를 부탁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뭐가 됐든, 휴지를 나눠 주지 않아서 정 없다.

외국인을 향한 종교 전도 활동도 늘어나는 듯하다. 타향살이의 심리적 빈틈을 공략하는 걸까, 내 맘대로 생각했다. 매대에 국적을 알 수 없는 글자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중국인을 붙들고 태블릿을 보며 얘기 나누는 한국인을 본 듯도 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친구 바흐티요르와 담배를 나눠 피우는 자미르에게 이 풍경도 ‘k-’일까 싶다. 내겐 ‘-ㅋ’의 풍경에 가깝다. 저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휴지도 안 주면서.


나는 무신론자다. 2+2=4고, 신은 없다. 내게 종교는 문화로 존중되는 것이지 진리와 무관하다. 이 관용도 문화상대주의를 이해하면서 생긴 예의일 뿐, 2+2=5라 우기는 종교를 근본적으로 싫어했다. 키보드 워리어 끝물, 앞날이 캄캄해 마음의 칼날이 잔뜩 서 있던 날, 집에 가는 길에 그들을 만났다. 보통은 무신론자라며 지나쳤지만, 그날은 유독 뿔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오냐, 한 번 붙어보자. 그 자리에서 논쟁을 벌였다. 나를 전도하려면 신을 증명해야 했지만, 신은 실재가 아니라 믿음이므로 우리 사이에는 불쾌감만 남을 게 뻔했다.


“저희 선생님과 함께 얘기해보시겠습니까?”


15년도 넘은 일이라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는 함께 성경 공부 모임 ‘선생님’을 만나 보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래, 끝장을 보자. 오타쿠들도 그들끼리 즐길 뿐, 취향이 다른 이에게 자기 취향을 강제하지 않는데, 너희는 대체 왜 이다지도 무례한가. 지금은 절대 하지 않을 귀찮음을 감수했다. 내가 설득 당해도 내 승리였다. 일상에 사랑을 충전할 수 있다면 종교를 믿는 것이 이익이라 계산은 했다. 단, 없는 것에 설득되지 못했다. 사랑이 없어 ‘인생ㅋ’로 냉소에 날이 섰고, 날에 내가 베이던 때였다. 내일 눈 뜨면 또 할 일 없는 오늘이 닥쳐올 거라는 확신밖에 없는 인간은 뭐든 온순하고 거대한 걸 믿어야 했다. 거짓말이라도 사랑, 그런 게 필요했다.


그들은 강산애 아파트 사거리에서 얍량 쪽 오르막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직 임당동 이주 초기라 가본 적 없는 길이었다. 오르막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도 펼쳐진 원룸 단지를 보며 개미굴을 생각했다. 사람 하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 이거 뭐지. 자기들 예배당쯤으로 갈 줄 알았는데, 금비 마트를 지나서 어떤 원룸 건물로 들어갔다. 상상해본 적 없는 것을 대면할 때, 뇌가 잠깐 멈춘다. - 뭐야, 장기 털리는 건가 - 당시 백수이던 송에게 슬쩍, 원룸명과 호수를 문자로 보냈다.


투룸에 내 또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원룸=주거지’로만 생각했던 내게 낯선 풍경이었다. 그 기괴함의 중심에 중년 사내가 있었다. 당신이 오타쿠대마왕인가. 우리는 작은 방에서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가부좌로 앉아 얘기를 나눴다. 그는 나를 구원하려 했고, 나는 그를 계몽하려 했다. 서로 필사적이었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얼굴도, 그 방 공기도, 우리 대화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쫓기는 입장이었다. 그는 초반의 온화함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 진짜 장기 털리는 거 아닌가.


이 평행선을 어찌 마무리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무사히 나왔다. 송에게 뭔 말이냐고 문자가 와 있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웃어댔다. - 아, 진짜 목숨 왔다 갔다 했다니까. - 어렸다.


나이가 들어버렸다. 지금은 전도하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본다. 당신은, 외면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강산애 아파트 사거리에서, 진사촌 앞에서, 오렌지거리 입구에서, 올리브영 앞에서 당신들은 그냥 지나쳐졌다. 행인들이야 본래 서로가 서로를 지나치지만, 아마 대부분, 당신이 지나쳐지는 건 고의일 것이다. 당신은, 당신만 무시당해도 괜찮은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나?


스타벅스 3층에서 당신을 내려다 본 적 있다. 당신은 혼자였다. 잘 차려 입은 채 제자리에서 누군가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을 걸고 뿌리쳐졌다. 학생들은 제 점심 챙기기 바빴다. 당신이 거절당하는 횟수를 세다가 스무 번을 넘어갈 무렵 그만 뒀다. 매순간이 자기부정이었을 텐데, 대체 당신은 촘촘하고 완고한 부정성을 어찌 감당하나. 내게는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은 쓸모없다’가 크게 들리는데, 당신은 당신 신의 ‘사랑한다’가 더 크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게 종교의 힘인가. 역시 부럽다. 나는 엄두조차 못 낼 고군분투다.


모든 거절은 맥락과 무관하다. 받는 쪽에서는 부정성으로 경험된다. 오랜 상담 전화가 등록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때, 특별한 조짐 없던 학생이 퇴원했을 때, 충격은 금전 이전의 실존 문제로 닥쳐온다. 시장의 합리성이지만, 단절된 지점에서는 ‘내가 필요 없는 존재인가?’가 선혈처럼 맺힌다. 아직 내게 남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호명함으로써 사랑은 몰라도 ‘당신은 쓸모있다’로 나를 구원해준다. 나는 아직 지적 생존자다. 그러나 생존하지 못했던 취준생 시절이 아직도 지나치게 선명하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


“학생!”


이 말에 흐뭇해지면, 확실히 아저씨인 거다. 내미는 손에 휴지가 들려 있었다. 제1 어린이 공원에서 어르신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교회에 청년부도 있으니 와 보라고 했다. 내가 청년인가, 의심했다가 농촌에서는 예순도 청년임이 떠올라 종교도 낡아가는구나 싶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며 웃음으로 흘러 넘겼다. 급똥의 순간, 가방에 쳐박아 둔 이 휴지만큼은 확실한 구원이었다. 진위여부를 떠나 당신들의 얼굴에는 늘 급똥을 해결한 안온함이 배어 있다. 당신들이 부럽지만, 내 얼굴에는 세월 속에서 굳은 표정의 아저씨만 익어간다.


공원에는 어르신들과 히잡 쓴 아주머니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앉아 있다. 히잡 쓴 아주머니들은 유모차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자기네 나라 말로 수다를 나눈다. 하느님과 알라도 휴지 한 장 두께를 건너지 못한다. 보통은 ‘아이고, 아가 예쁘네.’ 같은 말이 오가던데, 이 동네에서는 아직 서로가 서로의 이국적 풍경으로 끝나고 만다. 저 아이가 자라 ‘야, 씨발놈아ㅋㅋㅋ’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학생이 되었을 때, 네 종교는 무엇일까. 그리고 난 뭘 믿고 아직 임당동일까. 걸그룹이라도 숭배하고 싶지만 잘 안 된다. 내 찬송은 침묵이다. 안다. 시끄러운 공염불.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21화대학가에 사는 압도적 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