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야구가 하고 싶어요
대구 사람들이 야구에 열광하는 걸 보면, 아니꼽다. 2025년 홈 관중 1위를 생활에서 느낀다. 아이들이 야구 이야기를 하고, 야구장에 가고, 야구 선수 스티커를 모은다. 출퇴근길에 관객으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섞으면 좀 짜증난다. 라팍을 지날 때 속으로 진심으로 기원한다. 삼성 깨져라. 내 속좁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난 죄로 롯데팬이다. 888-8577에 이어, 2025년에는 가을 야구 확률 94.9%를 12연패로 엎어버렸다. 오타니와 다른 의미로 개연성 없는 팀이다.
대구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이 야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낯설었다. 운동장에 야구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왜 부산을 스스로 ‘구도’라고 칭하는지 이해됐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나는 그날 스포츠 뉴스를 못 보면, 신문 가판을 기웃거리며 승패 여부를 확인해야 했고, 기사 타이틀이 애매할 때는 엄마를 졸라 300원을 타내야 했다. 가난한 동네였는데도, 한 집 건너 야구 글러브가 있었고, 누군가는 배트가 있었다. 공이 필요할 때는 테니스장 옆을 뒤지면 담장을 넘어온 테니스공이 몇 개씩 나왔다. 나는 제구력이 좋은 편이었다. 장타를 맞아 나간 걸 보면 볼끝은 가벼운 모양이었다. 오버로 던질 때보다 그나마 언더가 덜 맞았다. 혼자 있을 때는 아파트 계단에 돌멩이로 스트라이크존을 그려놓고 공을 던지며 놀았다. 대구에서는 내가 무능할 기회도 없었다.
대구의 야구 열기가 기꺼운 건 왕조 시절 때문이다. 6점 주면 7점 내서 이기던 로이스터 시절, 롯데는 뒷문이랄 게 없었다. 이기고 있어도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닌 야구를 했다. 로이스터와 재계약하지 않은 다음해, 삼성은 7회에 이기고 있으면 끝나는 야구를 했다. 오승환을 갖고 싶었다. 이 세상이 게임이라면 이대호와 트레이드라도 했을 것이다. 내 마무리 기갈이 사무친데, 대구 사람들은 그 귀함을 몰랐다. 대구도 라젠카로 오승환을 숭상했지만, 오승환은 팬서비스용 영웅이어서는 안 되었다. 당신들의 왕조시절이 부산에서 이뤄졌다면, 부산에서는 2002년 월드컵 신화가 재림되었을 것이다. SKY 진학률이 떨어지겠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대구는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어르신, 좀 더 버텨 보시지 그랬습니까. 대구에도 야구의 봄이 왔는데 말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삼성에는 이승엽, 오승환, 이대호, 류현진 옆에 놓을 만한 이름이 없는데도, 구도는 대구에 양보해야겠습니다. 대구 사람들이 야구를 너무 좋아합니다. 이 글은 배팅 연습공을 나눠주신 당신을 생각하며 씁니다.’ - 나는 땅 가진 사람들은 다 부자라고 생각했다. 배팅 연습장 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식이었다. 야구장에 갈 수 없어 배팅 연습장에 간간히 드나들던 2010년 초반이었다.
이 동네에 배팅 연습장 두 개가 있었다. 야구가 지금처럼 인기가 높던 시절이 아니어서 의아했다. 500원인지 1,000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공 몇 개를 줬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임당 쪽보다 압량 쪽 배팅 연습장을 주로 이용한 건 분명하다. 오렌지거리에서 몇 걸음 더 가까웠다. 어느 날 문득, 임당은 철거되어 있었다. 이 동네 배팅 연습장 시장은 결국 압량이 독식했다. 그래봤자 먹을 게 없었다. 오렌지거리를 걸을 때, 깡, 깡, 소리가 들리는 일은 드물었다.
내가 인생에 두들겨 맞던 시절이었다.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내 주머니 사정 대비 배팅 연습장을 자주 찾았다. 내가 혼자 놀 수 있는 방법은 자전거, 코인 노래방, 배팅 연습장 정도였다. 배팅 연습은 시간 대비 가장 비싼 놀이였던 셈이었다. 빠른 공은 벅찼고, 느린 공은 자존심 상해, 주로 보통 속도를 쳤다. 정타 확률은 나쁘지 않았다. 정타의 순간, 손 안으로 고여드는 타격감은 인형 뽑기에 댈 수 없는 날것의 도파민이었다. 옆 타석에 누군가 있을 때 집중력이 확실히 올라갔다. 그렇다고 정타 확률이 올라가진 않았다. 어쩌다 내가 좀 더 잘 친 것 같았을 때는 뿌듯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방망이를 휘두르고 싶었지만, 지갑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갑이 허락하지만 누가 돈을 준다고 해도 못 칠 거다. 그때의 허리와 어깨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간 건 겨울이었다. 당시의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장님의 풍경은 기억한다. 배팅장 안쪽 컨테이너에 노인이 상주했다. 500원짜리 동전을 바꿔주고 배팅장을 관리했다. 종종 노인이 없어 배팅하지 못할 때도 있을 만큼 그다지 성실한 타입은 아니었다. 노인을 사장이나 땅주인이 아니라 직원이라 생각했다. 컨테이너 안팎의 옹색함 때문이었다. 노인의 입성이 그랬고, 오래된 담요가 그랬고, 확실하지 않지만 컨테이너 밖에 폐지, 공병이 쌓여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기름 난로가 쓰러져 컨테이너가 전소되었다는 뉴스가 나도 그럴 듯했다. 초등 시절, 동네 공터에서 퐁퐁(트램펄린) 네 개를 깔고 아이들 상대로 장사하던 노인이 그렇게 죽었다. 두 노인은 시간 차만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평소 말 없이 동전만 교환했기에 노인과 어떻게 말을 섞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노인의 한탄을 주저리주저리 들은 기억은 선명하다. 노인은 배팅장 사장이자 땅주인이자 건물주였다. 인근의 자기 원룸 건물에 사는 듯했다. 내 내년 신세가 석 자인 판이라 웃음도 안 났다. ‘어르신, 그럼 제 신세는 어쩌지요’를 삼키며 들었다. 이런 세계 이야기를 접하는 건 흔치 않았다. 노인 식구들 이야기가 있었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은 걸 보면, 금전 격차에서 오는 기만적 상황이 강렬했나 보았다.
사장님은 배팅장을 철거한다고 했다. 밥도 대충 먹고, ‘개새끼’처럼 이곳에 매여 있는데 돈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전 교환기 설치를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장사하는 집에 사장이 지키고 있어야 한다’가 몸에 새겨진 사람이 무인 시스템을 받아들이긴 힘들어 보였다. 성실한 강박을 지키는 데도 돈은 안 되고, 와서 할 일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니니, 진빠지는 모양이었다. 돈이 안 되는 것에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물 수리비, 기계 수리비, 도난당한 공 충당 비용이 만만찮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배팅장 철거비만 2,000만 원이 든다고 하던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당시 내 희망 연봉이 그쯤 되었다. 자기 얘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이젠 필요 없다며, 새 공 하나를 나눠 주었다.
차라리 주차장으로 굴리는 게 속편하겠다고 하더니, 몇 달 후 진짜 주차장이 생겨 있었다. 그래서 좀 살 만해지셨을까. 지금은 당신의 푸념에 공감한다. 서 있는 곳이 바뀌어 풍경이 바뀐 것 같아 내가 기만적이다. 이젠 나도 내년이 불안하던 춘궁기에서는 벗어났고, 소득세, 국민연금, 의료보험의 지엄함을 안다. 당신은 확실히, 부자가 아니었다. 그 근처 월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20만 원 남짓했고, 세입자의 을질, 공실의 불확실성으로 당신도 썩 편치만은 않았었을 것 같다. 주차장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주차된 차는 드물었다.
주차장 인근 3층 건물에 무인 탁구장이 생겼다. 돈을 넣으면 네트가 기립해 여럿이 탁구를 칠 수도 있었고, 기계가 공을 뿌려줘 혼자 플레이할 수도 있었다. 두 번 갔다. 갈 때마다 짜장면 한 그릇 값은 썼지만, 역시 타격감이 약했다. 공을 건드려 되보내는 게 아니라, 닥쳐오는 속도의 공포를 이겨내고 힘으로 쳐내야만 하는 우격다짐의 승리, 난 그게 필요한 모양이었다. 배팅 연습을 하고 싶다. 스트레칭 열심히 하면 짜장면 값 정도의 스윙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야구 붐을 생각하면, 주차장보단 나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이 사업을 해보고 싶진 않다. 땅을 사고, 설비 투자하고, 몇 달 돈 버는가 싶으면 방학이다. 외국인 남자는 항상 많지만, 이들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구자욱을 알기나 할까 싶다. 역시, 여기에 새 배팅 연습장이 생길 일은 없을까? 롯데가 우승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일까? 혹은 뚜언, 솜차이, 아지즈 씨가 엘도라도를 부를 날이 빠를까? 그때가 배팅 연습장 사업 타이밍이라는 정도는 알겠다. 뚜언, 솜차이, 아지즈 아들들은 학교에서 구자욱, 원태인 얘길 할 테니, 사업 타이밍은 10년쯤 후.
사장님이 남긴 공은 던져보지 못했다. 신발장에 보관해 뒀는데, 어느날 보니 삭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