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군지 vs 비비비학군지
같은 버스에서 내렸던가. 신호등을 건널 무렵부터 내가 뒤를 쫓는 모양새였다. 두 아이의 가방, 신발 브랜드가 같았다. 체구와 머리 스타일도 비슷한 걸로 봐서는 쌍둥이 자매인 듯했다. 초등학생이라고 하기에는 키가 컸고, 중학생이라고 하기에는 가방이 아동틱했다. 아이들은 오렌지 거리로 들어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대화도 없이 묵묵히 걸었다. 해야 할 일을 단조롭게 수행했다. 오렌지거리를 관통해 공원 놀이터까지 가서야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빠졌다. 뒤통수마저 조심스럽고 얌전한 초식동물 같은 분위기, 분명 작년에 봤던 그 아이들이었다.
공원 아래 K할인마트를 너머로 들어가는 한국 여자 아이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한국인 대학생, 외국인 유학생과 노동자, 한국인 노인들이 주를 이루는 동네다. K할인마트 바깥 쪽은 원룸촌 가장자리였다. 소규모 단독 주택과 코아루 아파트가 있었다. 아직 농가도 남았지만 폐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이가 사는 곳이 궁금했지만, 그때도 따라가진 않았다. 다만 주변 1km 이내에 보습학원 하나 없는 게 떠올라 이 아이들은 입시에 불리하겠다고, 함부로 안쓰러워했다.
밤 10시, 수성구 학원가엔 한국 중고등학생이 득시글했다. 매체에서는 학군지 학생들을 불행하게 다루지만, 학원 끝난 아이들은 정작 생기 넘쳤다. 친구들끼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산발하는 웃음소리, 편의점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손에 들린 간식 거리마저 싱싱했다. 학생들을 태우러 온 학부모의 차가 도롯가를 바삐 오갔다. 이 아이들은 집에서 숙제를 하고 나면 밤 1시 전후로 하루가 끝난다. 이 치열한 풍경을 모르는 것이 K마트 너머 아이들에게 복인지 독인지 모르겠다. 중국,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인들의 자녀들도 수성구의 밤을 영영 모를 것이다. 우리 동네 밤 10시는 고요했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는 거룩하지 않았다. 수성구 아이들도 우리 동네의 밤을 영영 모른다.
이 동네 공원 놀이터는 10년이 지나고 보니, 머무는 인종이 변했다. 그럴 듯해 보이는 미끄럼틀 세트가 들어설 때만 해도, 연말 보도블록 교체 같은 세금 낭비라 생각했다. 그런데 간간히 아이들이 보였다. 라온 어린이집 아이들이 나와서 놀기도 했다. 요즘도 라온 어린이집 아이들이 종종 이용하기도 하지만, 주인종이 한국인이 아닌 건 분명했다. 혼혈도 아니었다. 외국인들이 자리네들끼리 가정을 꾸리고 이곳에 터잡았다. 초등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뛰놀 때, 공원 정자에서는 히잡 쓴 아낙네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외국인 옆을 지날 때마다 그들의 언어에 귀기울인다. 다문화는 현상이 아니라 저출산 시대의 해답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숫자만 보면 되지만, 생업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대의 해답이 일상이 될 때 한국어가 흔들린다. 중국 베트남, 우즈베이크스탄 식당에서 한국어를 모르는 사장님이나 점원을 자주 봤다. 어차피 자국 사람들을 상대로 한 장사를 할 셈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한국이 배제된 생태가 형성되는 것은 떨떠름했다. 토착민으로서 우세종 지위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이걸 고상하게 표현하면 ‘다문화’다. 다문화에 감수성을 덧붙여 인권, 존엄성을 외피로 두르고 우쭐해 하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한국어는 안전하다.
“간샤한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짧게 들었을 뿐이지만 분명했다. 한국어는 내 생각보다 더 안전했다. 동남아 사내가 한국인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웃음기 담아 말했다. 어린이집 차에 아이를 맡길 때 발생하는 한국적 의례였다. 내 길을 가는 바람에 뒤에 오가는 이야기를 다 듣지 못했지만, 언어교환보다 주류문화에 그들이 한국어 중심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자 의아해할 여유가 생겼다. ‘동남아 사내=외국인 노동자’인데, 왜 평일에 집에 남아 있었을까? 짤렸나? 그렇다면 한국적이었다.
“야, 저기 맛있는 거 있다!”
공원을 지날 때였다. 한 아이가 외치자 가볍고 빠른 발소리들이 내쪽으로 다다다 줄달음쳐 왔다. 아이들은 내 뒤에 떨어져 있던 모과를 주워 들었다. 낙과한 모과를 던전에서 획득한 성유물처럼 떠받들며, 득, 마이, 말리카, 사만다르들이 철수, 영희처럼 재잘댔다. 익지도 않은 모과향이 꺄르르르 퍼졌다. 히잡 쓴 아주머니들이 손짓하며 뭐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말을 굴려댔다. 지나치게 내 어릴 때 같아 나는 픽 웃으며 집으로 왔다. 한국어는 안전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임당초등학교에 다닐 것이다. 현재 학생 수는 전교 101명이다. 단순 산술해보면 학년 당 한 반뿐고, 한 반 인원이 17명이 안 된다. 내년에는 두 자리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 숫자를 지탱하는 것은 모과의 아이들이고, 간샤한니다의 아이일 것이다. 옹졸한 한국인으로서, 임당초등학교가 한국인을 생산하기를 바란다. 어렵진 않을 것이다. ‘K-’가 브랜드화 되었다. 우리의 미국 이민사에서도 2세대들은 자발적으로 영어와 영미 문화를 흡수했다. 철수와 영희가 된 아이들도 ‘K-’가 맛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도기 한가운데 서 있는 쌍둥이 자매다. 이 자매도 이 학교 출신일 텐데, 학교에서 소수자였을까 다수자였을까. 지하철역이 들어오는 동네도 인종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데, K할인마트 바깥의 바깥은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자매가 걷지 못한 수성구의 밤이 떠오른다. 너희는 진짜 한국인일까.
사실 내게 묻는 질문이다. 나는 수성구 사람도 아니고 임당동 사람도 아니다. 아직 수성구에 들 만한 물적 토대를 갖추지 못했다. 그 기반을 구축하려면 수성구에서 버텨야 한다. 나를 거쳐간 학생들이 임당초등학교 채울 정도는 되어 오다가다 만나기도 한다. 자주 가는 식당 아주머니들도 나를 알아본다. 그러나 내가 영원히 수성구에 들 수 없음은 안다.
임당동은 정서적으로 우리 동네다. 그러나 나를 불러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스타벅스 직원은 스몰토크 할 만하면 바뀌었다.
나는 희망을 팔며 실패한 동네에서 사는 셈이다. 내 학생들의 입시 마지노선은 경북대다. 의대나 약대를 제외하면 내 학생이 영남대에 올 일이 없다. 비하하는 게 아니라 임당동은 내 학생생들에게 ‘없는 세계’다. 학군지도 중하귀권이 붕괴되는 중이지만, 상위권 아이들은 ‘있는 세계’만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더한다. 애초에 부모님들이 이 악물고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부모들이 자기가 한 만큼 자식에게 요청할 때, 그다지 불공정해 보이진 않는다. 고작 지하철 20분 안팎, 지하로 된 국경선을 통과하면, 설국처럼 임당동이었다. 쌍둥이 자매가 산다.
한국인 중위권은 한국에서 어중간하다. 영남대는 중위권을 훨씬 넘어서기에, 질문이 바뀐다. 다문화가 가려 놓은 것은 인종이 아니라 계층 문제가 아닌가. 그러니까 사실은, 나도 외국인 아닌가.
나는 괜찮다. 내게 임당동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대는 행복동이나 원미동이 아니다. 내가 떠야 할 때, 나는 더 괜찮은 동네로 가면 그뿐이다. 귀찮아서 움직이지 않는 권력을 이방인 감수성으로 포장한다. 그래서 쌍둥이 자매에게 목표 대학을 물었을 때 영남대라고 하면, 이건 좀 슬플 것 같다. 자매는 사만다르와 동기가 되며, ‘지방’으로 묶일 것이다. 지방 안에서 우리는 우리인가? 닥쳐올 시대의 숙제를 나는 또 느긋하게 관찰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