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 인생의 간이역일지 알았는데

by 하루오

과소비가 사라졌다. 흥청망청은 플렉스(flex)가 되어 우러러들 봤다. ‘소유물로 치장된 허약한 자아’는 꼰대 냄새 나는 고루한 자기 이해다. 신이 상호 주관적 상상물로서 실재해버리듯, 소유물로 표상되는 자아는 참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가치는 소비 능력과 정비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참을 수 없는 이 저렴한 인식을 편의점에서 마주한다. 나는 구시대 자취생이다.


우리 집 북쪽으로 반지름 250m짜리 반원을 그리면(남쪽 반원에는 작은 숲과 고분, 여남은 채의 농가가 있다.) 그 안에 할인마트 6개, 편의점 4개가 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낀 것도 아니고, 고작 월세 25만원 안팎의 원룸이 즐비한 동네에서 ‘싱싱청과물’에 맞먹는 생존경쟁이 펼쳐진 것이다. 13년 전 내가 이 동네에 올 때만 해도 할인마트 6개, 편의점 2개가 있었다. 그 사이 마트는 2개가 폐점하고 2개가 새로 생겼지만, 편의점은 2개가 폐점하고 4개가 새로 생겼다. 특히 마트가 폐점한 자리에 들어선 편의점이 3년째 생존 중인 것이 놀라웠다. 편의점이 마트보다 경쟁력을 갖춘 사태가 납득되지 않았다.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아시아 네 마리 용 시절에 성장한 내게 편의점은 깔끔하지만 비싼 가게였다. 소비의 절대 기준은 가격이었다. 500원짜리 캔음료를 600원에 사는 것은 비합리적이었다. 편의점은 낮에도 내부를 빛내는 밝은 조명, 세련된 디스플레이, 활기찬 광고로 상품의 본질을 흐렸다. 나는 화려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합리적 소비자였다. 늦은 밤에 그 가격이라면 야간 할증 정도로 이해하겠지만 대낮에 편의점에 가는 것은 나태이자 낭비였다. 만약 내가 편의점에서 음료나 과자를 샀다면, 그 당시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며 ‘가난한 자취생’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다.


내게 편의점의 진짜 정체는 신속하고 저렴한 식당이었다. 대학생 때의 편의점은 컵라면도 파는 삼각김밥집이었다. 컵라면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삼각김밥 700원, 2개 묶음 커플삼각김밥 1200원은 기억한다. 컵라면은 마트보다 비쌌지만 뜨거운 물을 제공하므로 가격 저항은 없었다. 편의점에서 커플삼각김밥을 사고, 마트에서 컵라면을 사면, 김밥 두 줄 가격도 안 되는 가격에 맛과 포만감이 타협할 수 있는 최선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편의점에 간다. 일과 일 사이에 틈이 없을 때, 밥을 하거나 식당까지 찾아 가기 귀찮을 때 샌드위치나 도시락을 사먹었다. 샌드위치는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강식이었다. 무려 날것의 채소가 들어갔다. 자취생에게 채소 섭취는 건강식의 기회이므로 샌드위치 중에서도 채소 비율이 높은 제품을 주로 구매했다.


삼각김밥이든, 샌드위치든 특정 제품이 음료 증정 이벤트를 하면 그걸 선택했다. 끼워주는 음료는 대체로 비인기 제품이었지만 양잿물보다 맛있으면 상관없었다. 이벤트가 없으면 별도로 음료를 구입해야 했다. 한때 푸르밀, 소와나무에서 1,000원짜리 행사도 했지만 요즘은 잘 보이지 않았다. 1+1은 줄어들고 2+1이 흔해졌다. 2+1도 가격 경쟁력이 생겼지만 혼자 식사를 때워야 할 때는 남을 2개가 거추장스러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억울하지만 목욕탕의 기억 때문에 단지형 바나나 우유 하나를 샀다.


편의점 도시락의 출시와 보급은 자취 식문화의 혁명이었다. 가격 대비 양과 질을 압도하는 편의점 도시락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이 만든 민간 차원의 복지였다. 삼각김밥을 먹을 바에는 1, 2천원 더 보태 도시락을 사먹는 게 효율적이었다. 도시락은 가격을 슬금슬금 올려 지금은 4천원대가 보편화 되었고, 고급화 된 도시락도 출시됐지만 여전히 괜찮은 가성비를 자랑했다. 햇반 하나를 더하면 2명이 먹어도 될 정도로 반찬도 넉넉했다. 내 입에 조금 짰지만, 어차피 매 끼니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할 것도 아니니 한 끼의 나트륨 폭탄 정도는 견딜 수 있다.


이 오래된 자취생과 달리 신입 자취생들은 ‘편의’에 지불하는 비용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마트까지 가는 길에 100보를 더 써야 한다면 왕복 200보의 번거로움과 시간을 아껴 캔음료에 200원을 더 지불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식이다. 아시아 네 마리 용에서 단독으로 치고 올라오던 시절에 태어나 선진국에서 성장한 세대사를 감안하면 그들의 소비성향을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밝은 조명, 세련된 디스플레이, 활기찬 광고로 미장된 저렴한 편의는 생(生)의 기본 값이었을 것이다.


구멍가게(0)와 백화점(10)이 양극에 있는 수직선에 편의점 좌표를 찍는다면 나는 7-8 정도를 부여할 것이다. 구멍가게는 ‘필요한 걸 그럭저럭 구비해 놓았으니 골라보슈.’하는 느낌이었고, 백화점은 ‘어서 오세요! 이렇게 예쁜데도 안 사실 거예요?’ 라며 적극적으로 구매를 자극하는 인상이었다. 나는 필요를 소비하던 세대였기에 편의점의 화사함과 포장된 친절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편의를 소비하는 세대의 편의점 좌표는 나보다 왼쪽에 찍힐 것이다.


대학가에 살며 학원가에서 일하다 보니 편의점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학생들을 자주 본다. 그들의 얼굴에서 15년여 전 내 얼굴을 본다. 무채색 표정에는 입맛이 없다. 식사란 17시간 후의 똥을 생산하기 위한 초기 절차로 전락한다. 앞날의 불확실함을 견디기에는 터무니없는 식사다. 플렉스 세대이기에 플렉스하지 못한 식사는 내가 삼켰던 우울보다 더 맛대가리 없을 것이다.


편의점은 젊은 날 빈곤을 청춘으로 버티는 일종의 군대였다. 요즘 군대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군대는 군대이듯, 편의점을 중심으로 뺑뺑이 도는 생활사는 편해졌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편해져도 되는데도 내 남은 평생에 삼각김밥을 제대할 자신 없다. 한편, 너희의 제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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