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과일과의 이별을 예감했다. 평생 안 보고 살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이가 소원해질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주 6일 근무에 세전 월 150만 원의 자취 시절, 앞으로의 연봉을 확신할 수 없을 때였다.
그해 8월, 마트에서 내가 수박을 당연하게 지나치는 것이 문득, 당연하지 않았다. 1,000원짜리 햄 쪼가리 근처를 어슬렁대며 생각해 보니 여름의 허리가 꺾이는 동안 수박을 딱 한 번 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5월에 친구 결혼식 뷔페에서 먹은 몇 조각이 전부였다. 수박이 범접불가의 과일로 승격되는 동안, 나는 싸구려 인간으로 강등된 듯했다.
당시 내 나이 때의 아버지는 일찍 결혼하셔서 9살, 7살짜리 아들 둘을 뒀었다. 아버지의 벌이는 당시의 내 벌이보다 나은 듯했다. 아버지는 두 아들 입에 수박을 물렸지만 나는 내 입에 수박을 물리지 못했다. 한 통에 14,000원 앞에서는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가끔 1/4로 잘라 3,500원에 팔기도 했지만, 한 덩어리에 3,500원을 주고 샀던 기억 때문에 망설여졌다.
날씨 탓에 유독 수박이 비싼 해였다. 9월로 넘어가도 수박 값은 내리지 않았다. 수박을 먹지 못한 채 여름이 끝날 것 같았다. 마트에 갈 때마다 1/4로 잘린 수박이라도 사려고 했지만 막상 찾을 때는 없었다. 대신 수박 모양의 수박 맛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수박 맛 아이스크림에서는 수박 맛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고, 베어 물었을 때 사각거림도 없고 입 안에 즙이 흠뻑 차오르지도 않는 것도 당연해서 내 입 안의 달달함은 당연하지 않았다. 수박을 닮지 않은 향에서 수박을 추억하고 보니 이것이 인생인가, 조금 서러웠다.
‘무슨 맛’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미 ‘무슨 맛’을 더 많이 먹어갔다. 복숭아 대신 복숭아 맛 사탕을 먹었고, 포도 대신 포도 주스를 마셨다. 고기조차도 고기가 함유된 육가공품을 먹었는데, 그나마도 고기 함유량이 떨어지는 저렴한 제품 위주였다. 나도 절반의 인간에 설탕과 화학조미료를 때려 부어 만든 유사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인간 냄새는 나지만 인간 맛은 나지 않는 나는 이제 수박 맛 아이스크림의 세상에 순종해야 했다. 하긴, 직장 생활을 하는 누구나 ‘진짜 나’가 아닌 ‘유사 나’로 살아가니 몸의 안팎은 일관성 있는 셈이었다.
과거에는 농민들도 순면을 입고 유기농 채소를 먹었는데, 이제 순면과 유기농은 부자들이 차지했다. 하층민은 나일론을 입고 깡통이나 비닐 안에 든 음식을 먹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을 주로 섭취하는 모습은 공장에서 가공된 가솔린을 주유 받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열효율만큼은 좋아서 노동에 적절했다. 의식주는 매한가지여서 부자들은 벽에 황토를 발랐고, 하층민은 시멘트와 화학 물질을 발랐다. 게다가 고시원이라는 관이 생존 공간으로 유통되었다. 스마트폰을 충전하듯이 눈 감고 수면을 충전해서 다시 일터로 나가면 될 뿐이었다, 우리 유사 인간들은.
일상이 생존에서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티켓, 과일이었다. 과일은 안 먹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어서 장바구니에서 소외되어 왔지만, 인생은 그런 여분으로 향을 풍긴다. 다 먹고 남은 수박 맛 아이스크림의 나무 막대를 반으로 꺾으면서 다음에는 수박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늘과 쑥을 먹은 곰과 호랑이처럼, 나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겨우 수박 한 통 사는 일이 이다지도 비장해져야 하나, 먹을 때 씨까지 몽땅 씹어 먹겠다는 각오가 진지해서 우스웠다.
내 각오란 14,000원짜리도 안 될 만큼 싸구려였다. 1/4로 잘린 수박이 나오면 사려고 했지만 한 통에 14,000원짜리 수박만 있었다. 3,500원과 14,000원 사이가 막막했다. 그 거리는 인간의 농도를 결정할 만큼 멀고 어려웠다. 결국 망설이기만 하다가 수박을 포기할 무렵, 늦은 추석을 나흘 앞두고 야식 거리를 사러 갔다가 1/4로 잘린 수박을 발견했다. 겨우 3,500원짜리 토막 난 수박을 봤을 뿐인데, 빙긋, 인간처럼 웃어버렸다.
그날 이후 연례행사로 제철과일을 챙겼다. 의도를 가지자 뒤늦게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 출퇴근길 반대 쪽 인근에 참외 단지와 토마토 하우스가 있었다. 농민이 직접 박스째로 파는 참외나 토마토는 10,000원으로 며칠을 두고두고 먹었다. 사과 낙과를 절반도 안 되는 값에 파는 행상도 주기적으로 동네를 오갔다. 한겨울에는 귤 한두 박스 정도는 먹었다. 더 먹을 수 있지만 박스를 살 때마다 사나흘이면 먹어치워 버려 자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먹어도 어렸을 때에 비하면 덜 먹었다. 이제는 내 나이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벌었고, 나는 부양가족도 없어 씀씀이는 더 여유로운데도 일상적으로 먹었던 어린 날에 비하면 지금의 과일은 이벤트에 가깝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는 엄마가 나를 먹였지만, 지금은 내가 나를 먹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입에 들어가는 ‘막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굳이 안 먹어도 상관없는 것’은 소비의 후순위로 밀렸다. 그게 사실은 내 일상의 광도를 낮추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합리성의 습관이 과일을 가로막는다.
유일하게 바나나 소비가 늘었지만 바나나를 과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리로 활용된다는 용도상의 이유로 토마토가 채소로 분류되듯이 바나나는 식사 대용품이었다. 그나마도 갈색으로 변색되어 반값도 안 되게 떨이로 파는 것들만 사먹었다.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전 여자 친구를 모른 척 지나치듯, 과일 코너에 눈을 주지 않는다. 내 시선의 자취 속으로 과일은 자취를 감추고 나의 자취(自炊)는 향기의 빈자리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