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Nov 09. 2021

국밥 - 말아 먹는 인생

겨울이 온다. 첫눈보다 빠르게, 국밥이 온다. 평소에도 다양한 국밥을 먹지만, 숨결이 하얗게 피어오를 때, 국밥은 입 안에서 기갈처럼 깊어진다. 뚝배기를 조심히 감싸 쥐고 시린 손을 녹였다가, 국물 한 숟갈 후후 불어 목구멍으로 넘기면, 봄날의 씨앗처럼 온기가 뱃속으로 뿌리 내린다. 양으로 음을 보하고 음에서 양이 태동하는 우주의 질서가 온몸에서 가지런해지며 겨울이 완성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김치, 비빔밥, 불고기 등이 우열을 다투겠지만, ‘한국인’을 대표하는 음식은 단연코 국밥이다. 국밥은 주막에서 발원해 지금까지 낮은 자리에서 넓게 퍼졌다. 족발, 치킨, 떡볶이가 신분 상승하는 동안 국밥은 얄팍한 지갑 옆을 지켰다. 덕분에 재래시장 귀퉁이에서 번화가 맛집까지 만만하고 든든했다. 마음껏 방심한 채로 편안하게 먹었기에 한국인의 본성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숟가락 문화가 발달했다. 밥과 국을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숟가락을 썼기에 밥에 국을 마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국밥은 가장 한국적 식문화다. 모든 국에 밥을 말았고, 심지어 물에도 밥을 말았다. 여백의 미를 살린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처럼 국밥의 미학은 그 단순성에 있을 것이다. 단순하되 복합적인 맛, 국밥은 국물이 들어간 비빔밥이다.


또한 국밥은 성질 급한 한국인에게 제격이다. 햄버거를 넘어선 슈퍼 패스트푸드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칠 시간이면, 국밥은 이미 한 숟갈 뜨고 있을 수도 있다. 쟁반 단위로 준비된 상차림에 이미 끓고 있는 국물을 부으면 끝이다. 부글부글 뜨겁지만 깍두기가 있기에 먹는 건 금방이다. 숟가락 단위로 퍼먹고, 국물이 있어 몇 번 씹지 않아도 삼켜져 한 뚝배기 별 거 없다. 애초에 장터 주막에서 회전율로 승부 본 음식이었다.


국밥은 지금도 고급 음식이 아니지만, 시작은 아예 천했다. 지금이야 국밥계의 대부 대접 받는 설렁탕도 20세기 초만 해도 먹지 않는 고기 부속물과 뼈를 오랜 시간 고아내 겨우 음식 구실을 하는 천것들의 안간힘이었다. 백정이 파는 음식을 공공연히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어서 양반들은 눈에 띄지 않게 배달해 먹었다. 1930년대, 비빔밥이 15전일 때, 설렁탕은 5전이었다.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은, 겨우 그런 음식조차 운수를 상징하고 그마저도 못 먹는 비참한 인생을 그렸던 것이다.


내가 처음 먹은 국밥도 가난을 소화하는 엄마의 안간힘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것을 ‘땡칠이 돼지국밥’이라고 불렀다. 처음 보는 그 음식은 국밥의 형태인 데다가 TV 속 영구가 노래했던 땡칠이 돼지국밥이 영구의 멜로디 그대로 우리만의 유행어로 입에 달라붙어 있던 탓이었다. 우리 집 땡칠이 돼지국밥에는 고기가 없었다. 사실은 멸치 육수에 김치와 콩나물, 밥을 넣고 걸쭉하게 끓여 낸 갱생이죽이었다. 계란 몇 개를 풀어 단백질의 구색은 갖췄던 것 같다. 우리는 땡칠이 돼지국밥을 콧노래로 부르며 수시로 갱생이죽을 퍼먹었다. 우리가 흥겹게 먹으니 엄마는 쌀쌀할 때면 자주 솥 단위로 끓여 주셨다. 땡칠이 돼지국밥은 흥겨운 만큼 맛있지는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며 별 수 없는 것은 운수 좋은 날처럼 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진짜 돼지국밥을 먹은 것은 고3 수능 친 이후였다. 넘치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닐 때, 돼지국밥은 필연이었다. 겨울에 뜨끈뜨끈한 국물을 감히 반대하는 녀석은 없었다. 돼지국밥은 스무 살을 앞둔 사내아이들의 지갑 사정 대비 먹성을 감당했다. 거기다 맛있으니 외식의 최고 존엄이었다. 부산에 살던 때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 돼지국밥집은 근처에 있었고, 어느 집이나 맛은 엇비슷했다.


돼지국밥의 원조를 두고 부산과 밀양이 다투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축산업이 발달한 지역도 아닌데 부산과 돼지국밥을 연결하는 것이 오히려 난센스였다. 부산에 살다가 대구, 경북에서 뿌리박고 보니 돼지국밥의 원조는 무의미했다. 입맛이 둔한 탓인지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있다면 개별 가게의 개성으로 여겼다. 어찌 되었든 그래봤자 돼지국밥이었고, 역시 돼지국밥이었다.


서울의 돼지국밥은 우리 지역과 다르다고 들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돼지국밥을 먹어 본 적 없어 돼지국밥의 지역 차이를 모른다. 그러고 보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 갔을 때도 돼지국밥을 먹지 않았다. 김밥천국의 상위호환이자 중화요리 같은 음식을 굳이 먼 동네에서까지 먹을 일은 아니었다. 국밥은 특별할 수 없는 일상 음식, 그래서 일상문화를 고스란히 밴 한국이었고, 나는 평범한 한국을 먹어 보편 한국인이 되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하얀 국물 계열 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었다. 십인십색이다. 나는 양념장도 넣지 않았다. 생부추를 줄 경우 넣었지만 양념된 것을 줄 때는 넣지 않았다. 새우젓으로 간만 맞췄다. 특별히 뽀얀 국물의 칼칼함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얀 국물의 기회를 하얀 국물 그대로 받을 뿐이었다. 라면, 짬뽕, 각종 찌개에서 빨간 국물은 흔히 먹어왔다.


어떤 색깔의 국밥을 먹든 국물까지 모두 비웠다. 내겐 모순된 식습관이었다. 나는 라면과 짬뽕 국물은 굳이 마시지 않았다.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더라도 국물을 남겼다. 국물은 면과 건더기를 축축이 적셔주기만 하면 되었다. 겨울에도 후후 불어가며 몇 모금 온기를 들이킬지언정 국물을 비우지 않았다. MSG국물이라는 라면국물의 혐의가 짬뽕국물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짬뽕은 억울하겠지만, 짬뽕이 라면의 형뻘이라는 선입견이 자동 연상되어 어쩔 수 없었다. 라면과 짬뽕의 조연으로 존재하는 국물과 달리 국밥의 국물은 주연이었다. 국밥은 이름 그대로 ‘국’과 ‘밥’이라는 개별 음식의 결합이므로 ‘국’은 밥을 빼고도 독립적인 음식이었다. 게다가 내 또 다른 선입견 속에서 국밥의 국물은 육수와 골수의 진액이 희석된 건강식이었다.


물론, 안다. 사실은 모두 다 나트륨국물이라는 거. 나트륨 함유량이 라면 하나에 1800mg 안팎이지만 뼈다귀해장국은 3000mg 안팎이다. 여기에 김치가 더해지고, 나는 국밥을 먹을 때 더 적극적으로 김치를 먹으니, 국밥 한 그릇은 혈압 관리에 나빴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혈압약을 복용 중이니 국밥은 맛있는 자해다.


자취를 하면서 국밥을 먹는 빈도가 늘었다. 국물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을 끓여 먹는 자취생이란 필름이 끊길 때까지 폭음하고 집에 와서 샤워까지 하고 자는 초인에 가깝다. 낚지볶음, 탕수육 같은 특식도 아니고 사소한 음식을 요리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귀찮다. 사소해서 귀해지는 역설을 라면으로 무마한다. 그러다 제대로 된 국을 먹고 싶으면 국밥이다. 백반집도 좋지만 대단위 원룸 단지에 백반 집이 없다. 이 또한 사소한 것들이 종합된 식사를 사 먹기 꺼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순대국밥에 꽂혔다. 국밥과 프렌차이즈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프렌차이즈여서 사골 스프를 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들깨가루의 텁텁한 듯 고소한 맛에 눈떠버렸다. 들깨가루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되, 국물 맛의 밀도를 채웠다. 국물이 묵직해서 보다 든든해졌다. 뼈다귀해장국은 스테디셀러다. 동네 하나밖에 없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가 건물주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근처에 재오픈했다. 졸지에 뼈다귀해장국 집이 두 군데가 생겨버렸는데, 구관이 명관이었다. 뼈다귀해장국은 살을 일일이 발라야 해서 게만큼 번거롭다. 된장찌개 속 게는 안 먹고 말았지만, 뼈다귀해장국의 고기는 필사적으로 발랐다. 나는 고기부터 다 바른 다음 한 번에 밥을 말아 먹었다. 그게 국밥이니까. 도보 15분 거리의 소고기 국밥집은 인근에서 유명한 맛집이다. 인근 한 끼보다 1,000원 정도 비싸고 홀이 큰 편인데도 점심에는 짧은 대기가 생겼고, 택배로도 팔았다. 인근 대학의 교직원, 시청 공무원, 학생들로 평일에는 늘 붐볐다. 그래서 보통은 주말 어중간한 시간에 갔다. 대구 동성로에 가면 선지국밥을 먹었다. 대구 중심에 내가 아는 맛집은 그곳뿐이었다. 경상감영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노인 분들도 많이 와서 여기도 점심/저녁 시간은 피하는 것이 좋다.


너무 친숙하기 때문일까. ‘말아 먹다’는 부정적으로 쓰였다. 시험을 못 쳤을 때, 하던 일을 망쳤을 때, 모두 말아 먹었다고들 했다. 시합을 말아 먹는 운동선수는 국밥집 차렸느냐고 조롱받기도 했다. 나는 그 ‘말아 먹다’가 좋았다. 나도 인생을 반쯤 말아 먹었기 때문이다. 열두 살의 내게 지금의 내 모습을 예언한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믿었다면 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비열하고 지질한 배불뚝이 사내가 되고 싶은 적 없었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10년, 20년 전 저장 파일을 찾아 로드하고 싶다. 그런데 말아 먹는 국밥이 맛있어서, 말아 먹은 인생도 맛있는 구석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진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에도 국밥이다. 다 쓰고 남은 고기 부속물과 뼈를 우리듯, 청년 시절의 찌꺼기 같은 나도 우려낼 뭔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속아주고 싶다. 위로 한 뚝배기, 뱃속에 똬리 트는 온기의 힘으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또 살아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