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고향은 없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내가 떠났듯 그들도 떠났다. 10년 전에 살던 곳에 가도 아무도 나를 모른다. 눈에 익은 풍경을 혼자 포옹하다 보면 잠깐 사이 품 안에 쓸쓸함이 덩그래진다. 더군다나 30년, 40년 전 유년 시절이면 풍경조차 나를 모른다. 살아갈수록 나는 기억에서 밀려나며 끝끝내 낯선 삶 속에서 분투하기 바빠진다.
고향은 판타지다. 전원일기 배경음악으로 설명되는 푸근함과 아련함은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지푸라기 타는 냄새 나는 풍경이 업데이트 되지 않기를 바란다. 소박한 무릉도원 하나쯤은 마음 구석에 구겨서라도 넣어두고 싶다. 그래서 짜장면을 먹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만만한 마음자리가 낯섦과 대면한 긴장감과 서먹함을 맛있게 비벼낸다.
짜장면은 변하지 않았다. 어제 먹은 짜장면과 30년 전에 먹은 짜장면의 맛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도 한결 같다. 그러나 그들은 엄마손 범주에 포함된 집밥이지만, 짜장면은 집을 나서야만 먹을 수 있는 이웃 음식이다. 짜장면을 먹으면, 고향에 갔는데 반바지 차림으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이웃집 아저씨가 심드렁한 듯 웃는 듯 애매하지만 친숙하게 ‘어, 왔나? 자주 좀 와라, 인마.’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짜장면이 음식의 왕인 시절이 있었다. 배고플 때, 엄마가 밥하기 귀찮을 때, 엄마한테 혼났을 때, 시험 잘 쳤을 때, 생일잔치 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짜장면은 만사형통의 정답이었다. 행복이 물화된다면 그것은 꼭 짜장면이어야 했다. 짜장면은 주인 만난 개 꼬리의 궤적 같은 흔적을 입가에 남겼다. 그러다 짜장면을 먹을 때 입가가 깨끗해질수록 짜장면과 멀어져갔다. 이유를 모른 채 맛있었듯 이유를 모른 채 멀어졌다.
짜장면에 매달린 내 일화들이 다채로운 것은 아니다. 군대에서 눈물에 적셔 먹은 적도 없고, 이삿짐을 옮기다 먹은 적도 없고, 당구장이나 만화방에서 먹은 적도 없다. 그러나 짜장면을 먹다 보면 그런 적이 있는 것 같다. 조작된 식탐은 대단해서 흔하고 사소한 기억을 몇 개 집어 먹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면을 후루룩 들이키다 보면 그런 기억들은 내가 잊었던 것들이겠지 눙쳐지며 없던 추억이 푸짐해졌다.
지금 내게 짜장면은 식사 메뉴의 주류가 아니다. 점심때나 먹지만 점심에는 찌개나 국밥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바쁘면 햄버거 세트를 먹는다. 중화요리는 어쩌다 먹은 별식이고, 그것도 짬뽕일 때가 많다. 짜장면을 먹더라도 군만두나 탕수육과 함께한다. 오롯이 짜장면만 먹는 일은 드물다. 한 그릇은 부족하고 곱빼기는 어느덧 부담스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 맛이 그 맛이고 그 맛이 이 맛인 점심 메뉴 사이를 떠돌다 보면 짜장면은 역시 괜찮은 대안이다.
자취를 하면 짜장면을 자주 시켜 먹을 것 같지만, 반대였다. 전역 후 복학 전에 짜장면 배달 알바를 한 이후로 퍼진 면을 먹지 않았다. 배달 시절 짜장면은 엄마가 해 놓은 카레 같은 음식이었다. 아침에 주방장 아저씨가 짜장을 한 솥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배달원들은 허기진다 싶으면 짜장면을 먹었다. 기계로 면을 뽑아 뜨거운 물에 30초만 삶으면 되어서 라면보다 간단했다. 그때 갓 삶은 면에 익숙해지다 보니 퍼진 면은 불량품 같다.
배달 앱이 등장한 이후로는 시켜 먹는 짜장면은 끝내 멸종했다. 나 때는 짜장면 한 그릇도 배달 갔었는데, 이제는 짜장면과 군만두를 합해도 배달 최소 주문 금액을 충족할 수 없다. 탕수육이 포함된 1인 세트는 주문할 수 있지만, 그 돈이면 앱마다 늘 할인 행사 중인 치킨을 시켜 먹는다. 그래서 불현듯 짜장면이 먹고 싶으면 중국집에 갔다.
짜장면의 미덕은 만만함에 있다. 짜장면‘이나’ 먹었기에, 씻지 않고 모자 뒤집어쓴 채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가서 한 그릇 뚝딱해도 무안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저렴하다. 우리 동네 짜장면은 매장 현금가 3,500원이다. 15년여 전 내가 배달 알바 하던 시절 곱빼기 가격이다. 요즘은 노점 떡볶이도 1인분 3,000원, 붕어빵도 2개 1,000원 하는 시대다. 짬뽕이 5,500원인 것을 감안하면 짜장면은 미끼 상품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짜장면의 상대적 가치는 하락했을지 모르나 절대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3,500원 안에도 짜장면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고기가 들어 있다. 완두콩이나 옥수수 고명도 생략하는 법이 없다.
짜장면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완벽이란 더할 것 없는 상태다. 짬뽕은 소고기, 굴, 전복, 문어 등을 더함으로써 식재료의 부족함을 자백했다. 짬뽕이 먹고 싶을 때, 주머니 사정만 허락하면 고기짬뽕이나 해물짬뽕을 먹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러나 짜장의 하위 분파인 유니짜장은 사멸의 길에 들어섰고, 삼선짜장은 쟁반짜장에 흡수통합 되고 있다. 짬뽕은 불닭의 시대에 휩쓸렸지만 짜장면은 매운 맛을 허락하지 않고 고고했다. 물론 간짜장과 쟁반짜장은 풍부한 식재료로 맛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짜장면은 짜장면에만 쓰이는 춘장의 독립성으로 짜장 이외의 재료는 수묵화의 여백처럼 품었다. 그래서 주머니 사정과 무관하게 짜장면 그 자체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또한 단무지가 더해진다는 점에서 짜장면의 불완전성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단무지는 대체 불가의 단짝이라는 점에서 짜장면과 한 몸으로 봐야 한다. 카레, 라멘, 돈가스에 침투한 김치조차 짜장면의 단무지를 대체하기 힘들다. 짜장면의 느끼함을 씻어낼 수 있는 것은 식초로 몸을 적신 단무지뿐이다. 달이 떠야 밤이듯, 노란 반달이 뜰 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검정색도 짜장면이다.
요즘은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가져 본 적 없는 내 아이가 보고 싶다. 내 아이의 입가에 펼쳐진 주인 만난 개 꼬리의 까만 궤적 속에, 짜장면 시켜달라고 조르던 나와 내 새까만 입가를 닦아주던 젊은 어머니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늙은 자취생에게 그런 고향은 허락되지 않을 테니 나는 영원한 실향민으로 짜장면을 먹게 될 것이다. 달이 뜨지 않는 밤, 8살, 6살짜리 조카들을 만나면 꼭 짜장면을 같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