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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05. 2021

커피 - 자본주의 시민의 혈액

커피는 기호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다. 근로자의 혈액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섭취하면 부릉부릉, 피가 예열된다. 식후땡은 긴급 수혈의 시간이다. 도시인은 더 이상 아침에 우유 한 잔, 점심에 패스트푸드로 쫓기지 않는다. 이제는 아침도, 점심도, 커피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지는 몰랐다.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학생에게 카페인은 성적의 필수 영양소였다. 당시는 무작정 마셔되지는 못했다. 용돈의 한계 때문에 극한의 졸음 앞에서야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달달한 기능성 식품에 가까웠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시험기간에만 간혹 마셨다. 평소에 졸음을 참아가며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아니 놀기 바빴으므로 각성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시험과 무관한데도 커피숍에 가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대인관계 중 커피를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는 핫초코를 마셨다. 핫초코가 훨씬 부드럽고 달달했다. 여자 친구는 아기냐고 놀렸고, 나는 응애, 해줬다. 그 또한 커피보다 달달했다.


커피가 기호품으로 승격된 것은 기숙사 룸메이트 형 때문이었다. 그는 방에 믹스커피와 녹차티백을 쌓아두며 내게도 마시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를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능성 식품을 내게 권하는 것을 공부에 대한 격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달달한 맛에 끌려 공짜 커피를 한 달 정도 마시고 보니 어느새 나도 잠과 무관하게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담배가 점유하던 ‘식후땡’ 문화를 커피가 이었다. 아침, 저녁은 몰라도 점심만큼은 식후 커피 한잔으로 마무리되었다.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는 시간과 담배를 뻐끔대는 시간은 엇비슷했다. 1분 안팎의 시간은 15분 안팎의 저작운동을 마치고 정리운동 삼기에 적절했다. 짧고 알찬 느슨함으로 식사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다음 쿼터를 치러낼 준비가 완료되었다.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슛, 골과 노골로 운세를 점치기도 했다. 아침, 점심의 식후땡이 내 하루 루틴이 되었다.


티끌 모아 태산도 이런 태산이 없었다. 믹스커피 한 잔에 50칼로리, 매일 두 잔 마시니 한 달에 3,000칼로리, 7,800칼로리를 소모해야 1kg이 빠진다고 하니 1년에 4.5kg가량이 커피에서 온다고 산술되었다. 치킨이나 삼겹살도 아니고 고작 종이컵 반 모금 때문에 뱃살이 늘어나야 하는 사태가 분했다.


단 것을 끊으려고 ‘카누’를 탔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되어 ‘저 이번에 내려요.’ 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카누는 카누대로 마시고, 집에 믹스커피가 없으니 굳이 동네 마트까지 가서 레쓰비를 추가로 마셔대는 부작용이 생겼다. 믹스커피 대비 칼로리는 엇비슷한데 돈은 돈대로 더 들이고, 카페인 과다 섭취로 잠자리를 뒤척이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믹스커피에 항복하고 그들이 지배한 입맛에 순종 중이다. 내 저렴한 입맛은 어느 탕비실과도 공유될 수 있어서 어딜 가든 커피에 만족했다.


내 밥벌이 내가 하는 무렵부터는 외출 시 자판기 커피와 결별하고 캔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초기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진 지금도 기껏해야 마트에서 1,000원 행사하는 T.O.P 계열의 달달한 커피를 마셨다. 한 번 학습된 아비투스가 고정된 탓이기도 했고, 달달한 각성제에 취향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아메리카노의 대중화는 충격이었다. 내게 아메리카노는 마실 수 있다고 여겨지는 구정물이었다. (에스프레소는 오니 엑기스였다.) 누군가는 특이 취향을 가질 수도 있다지만 집단 전체가 열광하는 사태는 기괴했다. 여자 친구는 내 입맛이 촌스럽다며 내게 아메리카노를 강요했다. 나는 우리 관계에 세금을 내는 기분으로 따라 마셨다. 마시다 보니 신맛이 강한 것보다 구수한 보리차 계열의 것은 마실 만해졌다. 단맛이 빠진 가벼움은 오히려 식후땡에 더 잘 어울렸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스스럼없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평범한 사회인이 되었다.


아직도 자의로 스타벅스를 비롯한 커피전문점에 가는 일은 없다. ‘가난한 자취생’ 운운하면서 그런 종류의 커피를 테이크아웃 한 학생을 보면 내가 겪은 학창시절의 자취가 조롱 받는 기분이 들었다. 무려 라떼라니. 나 때는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였는데. 1Q84 같은 책을 배경으로 커피 사진 찍는 인스타적 허영은 내 감성도 아니었다. 커피 값에 2~3,000원 더 보태서 돼지국밥을 먹는 것이 자취생의 바람직한 산수다. 국밥집에는 자판기 커피도 공짜다.


그러나 취업 시장이 더 경직된 만큼 커피가 생존용품에 가까워진 현상은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아니 측은하기까지 했다. 요즘 학생들은 나 때보다 더 긴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더 큰 불확실에 마음 졸여야 하니 각성으로서 감정의 세부를 마비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커피 시대의 커피 시민이어야 했다. 커피 값은 체념을 쌓아두는 마음창고 확장비용인 셈이다.


커피 시대를 살아가기에, 절반의 커피 시민인 나는 불편할 때도 있다. 커피 한 잔을 사 주는 것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는 세련된 호의다. 학생들은 종종 늦은 저녁에 커피를 사와서 해맑게 내게 건네곤 했다. 그러나 3시 이후의 커피는 내게 밤샘 선고였다. 때로는 학부모님이 스타벅스 커피 교환권도 선물해주시곤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T 2잔 + 초콜릿 생크림 카스텔라’는 감사하고, 난감했다.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이런 것은 테이크아웃해서 한 잔은 다음날 마셨다. 커피 입문기에 있었던 여자친구들은 멸종한지 오래다. 괜히 늙은 자취생이 아니다. 아메리카노에 인이 박힌 만큼 더 이상 달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는 허구다. 커피 시민도, 절반의 커피 시민도 효율적 시민이기 위해 커피를 마실 뿐이다. 이 세계에서는 효율이 정의이고, 각성의 지속은 성과의 가속 폐달을 밟게 도와준다. 커피가 추구하는 것은 속력이다. 여유롭고 싶다면 스마트폰 없이 녹차가 우러나오는 시간을 음미해야 한다. 우리는 그 짧은 느림을 못 견딜 정도로 커피의 속도에 중독되었다. 우리를 멋진 신세계로 이끌어줄 달달한 소마,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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