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Sep 28. 2021

치킨 - 자아실현의 우울한 대체제

2018년 42마리, 2019년 42마리, 2020년 61마리, 2021년 60마리, 최근 4년 평균 51.25마리, 코로나 펜데믹 이후로는 주당 한 마리 이상 먹었다. 이 기간 동안 치킨을 안 먹은 달이 없었다. 2018년 6월 월세와 공과금 포함 56.2만 원을 지출하며 허리띠를 극한까지 졸라맬 때도 4마리를 먹었고, 2020년 12월에는 9마리를 먹었다. 내게 치킨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내 입맛은 사춘기 중이다.


요즘 사춘기 청소년들과 취업을 앞둔 청년들은 꿈을 갖지 않는다. 무엇을 꿈꾸든, 그 꿈은 재능 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될 일이라는 것쯤은 중학생도 안다. 개천에서 승천한 몇 마리의 용을 소개하며 ‘너도 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은 기만이다. 용도 이무기나 되어야 꿈꾸고, 될 성부른 이무기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떡잎이 평범하거나 부실한 절대다수에게 [자아실현]은 구닥다리 인생관이 되었다. 이제는 [입맛실현]의 시대다.


먹방이 범람했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즉각적인 쾌락은 꿈에서 추방된 평범한 패배자들의 낙원이 되었다. 패배자들은 패배자 이외의 자신이 누군지 몰라도 자신의 입맛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입맛만큼은 다양성이 인정되어 파멸될지언정 패배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돼지 앞다리살과 뒷다리살을 구분했고, 라면을 먹을 때도 자기만의 레시피를 찾아 나갔다. 입맛의 개별성은 SNS로 소통하며 융합과 분리를 반복하며 입맛조차 사회화되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도 내 입맛이 무엇인지는 폭 넓고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입맛은 유례없는 대항해시대를 열며 미지의 맛을 찾아 나갈 정도로 진취적이다. 신호등 치킨은 무모했을지 모르나 시대정신을 이끈 선구자다. 가장 많이 먹은 입맛이 가장 멀리 갔다. 누군가 맛의 신대륙을 발견하면 후발주자들은 한 끼를 위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줄을 섰다. 진심을 둘 데를 몰라 맛에 필사적으로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인생을 먹고 싸는 사태로 단순화 하며 하쿠나마타타 하는 그들이 부럽다. 다시, 내게 치킨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글쎄다.


소비자 대중의 맛 감별 수준이 역사상 가장 예민해진 시대, 맛의 다양성 논리를 압살하며 맛의 천하를 일통한 배달 음식의 왕이 있었으니, 치킨이다. 중국음식은 짜장, 짬뽕, 탕수육으로 분파가 나뉘었고, 피자는 1인 가구가 먹기에 애매했고, 족발은 비쌌다. 치킨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는 민트초코, 파인애플 피자로 논쟁하던 무리들도 한 마음이 된다. 심지어 ‘부먹vs찍먹’ 논란에서 양념치킨은 논외 대상이고, 통닭이 아니라 chicken인 주제에 한식이다. 튀겨서 맛없는 것은 없다는데 치킨은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대적불가, 절대지존, 천하무적, 치느님의 위엄이시다.


치킨도 20,000원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내 실질 구매가는 배달비 포함 15,000원 이하였다. 배달 앱에서는 늘 행사 중이었다. 요일마다 다른 브랜드를 할인했고, 때로는 이런저런 명분으로 쿠폰을 뿌렸다.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페이코, 토스는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수시로 결제 할인을 더했다. 어차피 나는 아무 치킨이나 먹어도 만족도가 엇비슷했기에 그때그때 행사하는 치킨을 먹었다. 대학가와 아파트단지를 끼고 사는 덕분에 배달 거리에 어지간한 치킨 브랜드는 다 있었다. BHC의 레드킹, 대구통닭의 빨간양념, 60계의 간지치킨, 간혹 호식이 두 마리 치킨의 투박한 후라이드 등 약간의 취향이 있지만, 정가에 사 먹을 만큼 강한 유인은 아니었다. BBQ, BHC, 네네, 맘스터치, KFC, 호식이 두 마리는 귀갓길에 도보 1~2분만 더하면 픽업할 수 있어 배달비를 무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치킨을 좋아했다면 지하철 40분 거리에서 2013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는 치맥페스티벌에 한 번은 다녀왔을 것이다. 어차피 심심하니까. 그러나 가지 않았다. 그저 귀찮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맥주파가 아니라 콜라파다. 맥주의 뭉글뭉글한 거품 따위는 콜라의 탄산이 주는 칼끝 같은 청량감에 미치지 못한다. 콜라는 닭가슴살의 퍽퍽함마저 찢어낸다. 그렇다면 치콜은 맛있느냐, 글쎄다.


나는 치킨이 먹고 싶어서 치킨을 먹는다기보다는 맛있는 무언가를 먹고 싶을 때 치킨을 먹었다. “How are you?”를 들었을 때, “Fine, thanks and you?”가 자동으로 나오는 것과 같은 기작이었다. 특히 한 주를 마무리하는 퇴근길에는 보상심리를 참지 못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었지만 식당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 방에서 마음껏 방심한 채 밀린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며 최선을 다해 맛있고 싶었다. 단, 나는 그 ‘맛있는 것’을 제대로 탐지해내지 못했다. 유부남들이 말하는 ‘의무방어전’처럼 치킨은 내 입안에서 갈피를 못 잡는 내 식욕을 상대했다.


모 맛 칼럼리스트가 치킨은 양념 맛으로 먹는다고 했다가 혹평을 당한 적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지금은 그의 말에 꽤 공감한다. 먹고 또 먹으며 치킨에 둔감해지고 보니 고기 맛은 거기서 거기였다. 내 입은 튀김옷의 바삭한 질감과 단짠에 매운 것이 복합된 양념에 반응했다. 처음 두세 조각까지는 맛있지만 먹다보면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이 치킨이 아니었던 사실이 선명해지며 소위 ‘현타’가 온다. 이미 최고 몸무게를 갱신했으면서도 꾸역꾸역 처먹는 한 마리 돼지새끼라는 혐오도 동반된다. 그러다 우울해졌다. 치킨을 먹는 순간에도 맛있는 것이 먹고 싶었다.


마흔 넘은 비정규직에게 실현될 자아가 있을까? 희망, 그 어여쁜 거짓말에 이제 속지 않을 만큼은 현명해졌다. 내게 남은 건 번식에 실패할 정도로 상품가치가 떨어진 자아와 몸뚱이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궁색함이다. 그렇다면 소소한 행복감이라도 누려야 할 텐데 이 나이 먹도록 제 입맛도 모른다. 사실은 맛있는 인생이 고픈 것일 것이다. 시간이 자날수록 치느님이 나를 보우하시기지 못함이 느껴진다. 음식에 구체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어렸을 때, 엄마가 시장 통닭을 사왔을 때를 기억한다. 만화캐릭터처럼 방방 뛰었다. 통닭을 케첩에 찍어 먹었고 동생보다 더 먹으려고 늘 다투었다. 엄마가 이 정도는 당신도 할 수 있겠다며 집에서 양념치킨을 만들어 그 위에 땅콩가루를 뿌려줬을 때, 콩닥콩닥했던 설렘도 기억난다. 한 해 마지막 날 식구들이 고스톱을 치며 나눠먹던 화목함도 아련하다. 그러나 이제는 도통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실현의 가능성은 점점 물 건너가고, 어차피 먹고 또 먹을 치킨 - 온 가족이 오순도순 치킨 한 마리, 내 새끼 입에 들어갈 치킨 한 조각, 가지지 못할 기억이 그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