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은 자취생의 구원자다. 자취생 건강의 최후의 보루로서 절대 배신하지 않는 초록색 힘의 핵심이다. 된장의 리더십으로 인스턴트식품을 무찌른다. 밥상 위를 점령한 화학 첨가물을 향해 된장이 외친다. - vegetable assemble!
대부분의 자취생들이 겪는 비슷한 문제일 것이다. 우리 식단에는 채소가 부족하다. 채소는 맛도 없는 주제에 비싸고 손도 많이 간다. 그래서 1,000원, 2,000원짜리 육가공품과 김치의 상차림에 김, 계란, 멸치볶음, 진미채의 변주가 평균 식단이다. 김치가 건강식품이라지만 적정 채소 섭취량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다.
어렸을 때는 식단에 육가공품만 있으면 불만이 없었다. 식단의 핵심은 고기류였고, 나머지는 고기를 거들 뿐이었다. 물론 지금도 고기류는 식단의 주연이다. 그러나 채소가 적으면 안주 없는 술자리처럼 부담스럽다. 이제는 몸이 채소를 부른다. 채소를 먹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몸 구석구석에서 자잘한 이상 징후를 보낸다. 늘어나는 약봉지는 채소 청구서다.
내가 채소를 섭취하는 방법은 쌈이었다. 채소류를 씻어 두기만 하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었다. 상추나 양배추를 주로 먹고 가끔 호박잎도 먹었다, 양파와 오이고추의 기본 옵션에 시세에 따라 근대, 치커리, 미나리 등의 녹색 잎사귀를 추가하곤 했다. 한 쌈에 상추 두세 장을 깔고 치커리를 듬뿍 넣는 식으로 밥 대비 채소 비중을 높였다. 여기에 참치나 스팸 몇 조각으로 단백질을 갖추면 맛과 영양까지 채워졌다. 쌈의 유일한 문제는 두 손을 다 써야 하는 것이었다.
자취생의 귀차니즘을 얕보면 안 된다. 나중에는 잎사귀들을 채 썰어 보관했다가 끼니 때 비볐다. 쌈과 다를 바 없는 구성이지만 왠지 쌈보다 맛이 덜했다. 게다가 양배추는 채 써는 게 힘들었고(3년째 ‘채칼 사야지’ 중이다.), 비비기엔 뻑뻑했다. 그래서 전자레인지에 1~2분쯤 돌리곤 했다. 추가 작업이 진행되고 보면 귀찮음의 가성비가 쌈과 엇비슷해졌다.
최근에서야 된장찌개에 눈을 떴다. 자취 10여 년 만이다. 12년 전에 산 900ml짜리 간장이 아직도 남아 있을 만큼 요리와 담쌓고 사는 내게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예전에도 간혹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한 적은 있지만 1년에 두세 번 정도였고, 마지막은 최소 3년 전이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은 된장찌개를 끓였다. 곰곰이 따져 보니 귀찮음의 가성비는 된장찌개도 나쁘지 않았다.
귀찮음의 명시적 비용만 따지면 된장찌개가 불리했다. 더 많은 재료를 손질하고 칼, 가스레인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귀찮음의 암묵적 비용으로 눈을 돌리니 사정이 달라졌다. 비벼 먹을 때는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고 참치나 스팸을 추가하느라 손이 갔지만, 끓여 놓은 된장찌개는 두세 국자면 충분했다. 자작자작한 국물로 먹기도 편했다. 한 번의 귀찮음으로 8끼 이상의 편리를 구가하는 것은 명백한 이득이었다. 더군다나 단백질은 두부로 대체되니 훨씬 건강했다.
사실 된장찌개는 요리라기 민망할 정도로 조리법이 단순했다. 물을 끓이다 라면 스프처럼 된장을 넣고, 면을 넣듯 준비한 채소를 때려 부었다. 채소를 손질하는 10분 안팎의 수고가 더 들고, 3분 30초의 라면보다 조금 더 끓기를 기다릴 뿐이다.
내 된장찌개 레시피는 근본이 없다. 먼저 된장부터 진짜 된장이 아니다. 동네 할인마트에서나 파는 동그란 청국장을 썼다. 구린 냄새가 약해 유사 청국장이어서 그냥 된장이라 불렀다. 메인 건더기는 시금치였다. 시금치가 비쌀 때는 시레기를 넣었다. 시레기는 오래 삶아야 한다는 걸 몰라 시금치 때처럼만 끓였더니 질겼다. 밥 먹을 때마다 뼈 뜯는 개처럼 어기적어기적 씹어야 했다. 불편했지만 고기 대신 씹고 뜯을 게 있어서 다이어트 중에는 씹는 허기를 채워줘서 유용했다. 한 번은 단배추를 넣어 봤는데 무모한 시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단배추로 된장국을 해 먹는 걸 보면 단배추가 내 입에는 안 맞는 모양이다. 그 외에는 파, 양파, 버섯을 넣었고, 시세에 따라 가지나 애호박을 추가했고, 봄에는 달래나 냉이를 꼭 넣었다. 부담 없이 먹고 싶어서 굳이 땡고추를 넣진 않았다. 두부 한 모를 올렸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챙겨준 마법의 가루(건새우와 건표고 등으로 만든 천연 조미료)를 뿌리면 완성되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대접할 만한 맛은 아니다.
요리 못하는 사람들이 불 조절 개념이 없듯, 내 된장찌개는 건더기들의 양 조절 개념이 없다. 마트에서 최소 단위로 구입한 채소들은 한 번에 다 소비했다. 채소는 남겨봐야 냉장고 속에서 곰팡이 밥이 되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양파만 두 개만 지켰다. 시금치가 쌀 때는 냄비 두 개로 나눠 끓여야 할 때도 있었다. 애호박을 하나 넣다가 안 넣든, 가지가 하나 들어가든 세 개가 들어가든 어차피 맛은 된장에 수렴했다. 다만 채소의 양에 따라 염도가 달라졌다. 내 목적은 채소 섭취에 있기 때문에 삼삼하게 끓였다. 너무 삼삼하다 싶으면 쌈장을 풀었다. 집에 준비된 장이라고는 쌈장과 간장뿐인데, 간장을 넣을 수는 없었다.
내 된장찌개는 된장찌개라기보다는 채소찌개에 된장으로 간한 음식이었다. 끼니 때 채소와 밥의 부피가 1:1이 넘었다. 된장에 숨이 죽은 채소인데도 그 정도니 채소 섭취량을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다고 하는데, 내 된장찌개는 참 별로다. 밥 위에 소복이 올라간 채소를 보고 있으면 밥맛 떨어질 만했다. 그래도 채소를 머금은 된장냄새가 오래 묵은 기억처럼 친숙해서 거북하지 않았다.
내 된장찌개는 여름 음식이 될 수 없었다. 한 번 끓이면 최소 3일은 먹어야 했다. 국물이 남는다 싶으면 새로 채소를 더 넣고, 채소가 너무 많다 싶으면 물에 쌈장을 추가하다 보면 4~5일을 된장찌개만 먹기도 했다. 무한의 된장찌개도 가능했지만 물렸다. 그렇다고 내가 먹는 집밥 수준이 이 된장찌개보다 나을 게 없어 배달음식 몇 번 순회하고 나면 다시 된장찌개다. 된장찌개를 먹을 때 확실히 뱃속이 편안해지며 똥도 건강해진다.
올해 건강검진 결과는 ‘I off’다. 콜레스테롤, 지방간에서 정상을 벗어난 수치가 나왔고, 혈관 나이는 나보다 5살 연상이었다. 2년 전만 해도 멀쩡한 것들이었다. 최근 혈압약은 조금 더 센 걸로 바꿨다. 술 담배도 하지 않았기에 내 복부비만의 원흉은 코로나 시기에 찐 10kg이다. 된장을 중심으로 집결한 채소는 한 끼 500칼로리 안팎으로 내 몸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그래서 된장찌개는 말할 자격이었다. - I am ‘I on’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