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의 주연은 아니다. 그러나 유일무이한 조연이어서 주연보다 귀할지도 모른다. 제육볶음, 동그랑땡, 스팸구이 등 지방 머금은 단백질 기반 주연들은 대체 가능하지만, 김치는 대체불가다. 주연들이 당당할 수 있는 것도 사실 김치 덕분이다. 김치로 입 안을 깔끔하게 헹궈냄으로써 주연의 무대를 반복적으로 구축한 덕분에 입 안에서 탄탄한 육질과 순백의 밥알이 미끈한 기름기에 버무려지며 격한 애정신이 펼쳐진다. 다음 신(scene)을 위해 김치로 아삭아삭, 밥 한 숟갈의 맛이 완성된다.
짜고 매운 김치가 어떻게 입을 헹궈낼 수 있는지 반문한다면, 그러게 말이다. 1+1이 왜 2여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난감하다. 그냥 한국인이라서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마늘 먹은 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있으니 그만큼 둔하다고 둘러댈 밖에. 곰의 후손들은 나트륨 폭탄인 라면이나 뼈다귀 해장국에도 김치를 곁들인다.
어렸을 때 이웃에서 김치를 나눠주면 나는 곤혹스러웠다. 김치는 입 안에 각인 된 맛의 지문이다. 김치도 표준 레시피가 있겠지만, 집집마다 미묘하게 달랐다. 이웃과 배추, 고추, 마늘을 공동구매해서 담근 김치인데도, 이웃의 김치는 내 입맛을 열지 못했다. 외부 김치는 반찬보다는 찌개나 전으로 소비되었다. 더군다나 우리도 받은 만큼 김치를 나눠줘야 해서 김치의 상부상조만큼은 탐탁지 않았다.
우리 엄마의 김치는 동네를 압도했다. 음식 대접할 일이 있을 때 김치는 늘 칭송 받았다. 입 짧은 동생도 엄마 김치만큼은 투덜대지 않고 먹었고, 외식을 할 때는 김치로 투덜댔다. 그런 김치를 일상적으로 먹고 자랐으니 내 밥상은 축복 받은 셈이었다.
“김치 있나?”
내 식사 여부 다음으로 엄마가 많이 묻는 질문이다. 엄마는 코스피 폭락, 북한 미사일 도발, 코로나19 확진자 급증보다 내 냉장고에 김치 떨어지는 것이 큰일이었다. 없어질 법하면 즉시 보내주셨고, 본가에서 김치를 담그면 내가 생김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또 보내주셨다. 덕분에 내 냉장고에 김치 떨어질 일은 드물었다.
추석에 일이 있다보니 늘 본가에 못 갑니다. 퇴근 후 집에 와보니 엄머가 또 냉장고를 채우고 가셨네요. 김치는 당연히 1순위.
2주 가량 김치 없이 산 적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김치를 요청하지 않았다. 김밥에 단무지, 피자에 피클을 먹으니 단무지나 피클이면 김치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평소 음식은 가리지 않고 무던하게 먹었으므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김치를 단무지로 대체하고 일주일도 안 돼 이상 반응이 왔다. 점심이나 저녁을 사먹을 때 중국집에 가지 않았고, 어느 식당엘 가든 김치를 리필했다. 편의점 도시락도 김치가 많이 든 것을 골랐다.
물론 김치를 사 먹어도 괜찮았다. 요즘은 판매되는 김치도 먹을 만했고, 택배비 생각하면 그게 더 싸게 치였다. 그러나 김치를 사 먹으면 고려장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차마 사먹지 못했다. 김치는 냉장고에 깃든 엄마의 영혼이었다. 엄마를 버리고 냉장고의 심장을 CJ, 동원, 풀무원에게 내줄 수 없었다. 단무지에 질려 결국 엄마에게 김치를 요청했다.
냉장고에 김치만 있어도 끼니는 명맥을 유지했다. 계란 한두 개를 굽든, 참치캔을 따든 한 끼의 구색이 갖춰졌다. 게다가 김치는 극강의 식재료이기도 했다. 볶아 먹고, 전으로 부쳐 먹고, 찌개로 끓여 먹었다.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김치찌개는 먹을 만하게 끓였고, 김치찌개를 끓일 때 잉여 식재료를 처분할 수도 있었다. 인스턴트식품도 아니면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신김치는 신김치 나름대로의 맛을 냈다. 무엇보다도 엄마처럼 내 몸에 무해해서 냉장고에 김치라도 있으면 끼니가 불안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반찬만 허락된다면 김치는 주연을 물리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밥+제육볶음+동그랑땡+스팸구이 vs 밥+김치’의 대결은 해볼 만하다. 한 끼면 전자의 압승이 예상되지만 이틀 간 매 끼니를 명시된 식단으로만 먹어야 한다면 후자의 승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한 달, 1년, 기한이 늘어날수록 김치 쪽이 유리해질 것이다. 생김치라면 밥을 물에 말아 3분 뚝딱하고 한 그릇 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김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식 계열의 음식이라면 김치가 옆에 있을 것이다. 김치는 말하지 않아도 너무 당연한 엄마를 닮았다. 이름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한식을 먹든 김치가 포함되어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잊고 살지만 내 영혼에 인이 박혀버린 입맛. 김치는 입맛의 알파이자 오메가, 필연이다.
그래서 엄마의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결혼하더라도 아내에게 우리 엄마의 김치 만드는 법 배우기를 부탁하지도 않을 것이다. 엄마가 계속 ‘김치 있나?’라고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엄마도 하늘로 소풍을 떠나고 나면, ‘김치 있나?’의 부재로 엄마와의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