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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21. 2021

참치 - 라이벌 계란을 넘어서

참치캔은 방사능캔이다. 후쿠시마에서 유출된 방사능은 태평양으로 멀리 멀리 퍼져 탈카우아노 해변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칠레 누나 손등을 간질여 줬을 것이다. 다랑어들은 태평양을 퐁당퐁당 활개치는 동안 방사능에 절여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추론을 일본 정부가 공개한 사실보다 신뢰한다. 그럼에도 참치캔을 끊을 수 없었다. 대안이 없다.


참치캔은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자취생을 위해 신이 내린 식재료다. 육가공품은 굽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라도 해야 반찬이 되지만, 참치캔은 따자마자 반찬이었다. 김치만 있어도 한 끼 존엄성의 최소한이 갖춰진다. 무엇보다도 상온에 몇 년을 방치해도 될 만큼 보관에 용이하다. 가격도 저렴해서 2021년 4분기 기준 참치캔 200g 인터넷 최저가는 2.000원 초반대 수준이다. 우리 동네 마트에서 할인행사 들어가면 1,750원이었다. 행사할 때, 10~20개쯤 사서 쟁여 놓았다. 그 가격에 서너 끼 메인 반찬이 보장되었다.


물론, 진정한 원탑은 계란일지도 모른다. 계란은 비타민C를 제외한 영양성분이 모두 함유된 완전식품이다. 변동은 있지만 10알 기준 개당 300원대에 가격이 형성되고, 계란프라이 두 개면 한 끼 반찬으로 넉넉하다. 계란찜, 계란말이, 계란조림, 스크램블 등 요리도 가능해 참치에 비해 독립적 가용 범위도 넓다. 무엇보다도 계란에게는 비용, 품 대비 맛이 보장되는 압도적 가성비의 소울푸드, 간장계란밥도 있다. 한 끼 존엄성의 최소한이 참치보다 맛스럽다. 내가 과도하게 요리와 설거지를 귀찮아 할 뿐, 자취생의 평균적인 식문화 수준에서 계란프라이 정도는 허락될 테니, 간장계란밥은 독보적으로 간편하다. 방사능이나 중금속 걱정도 없다.


그러나 계란은 보관일이 짧다. 한 번 사면 일주일 이내에 다 먹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쫓겼다. 그래서 서른 알짜리를 사지 못했다. 나는 일일이 굽는 것도 귀찮아 열 알을 사서 한 번에 삶아 냉장 보관하며 필요할 때 한두 알씩 먹기도 했다. 삶은 계란은 기름에 튀기듯 구운 프라이보다 맛이 덜했다. 또한 간장계란밥은 참치마요밥으로 대응 가능하니 독보적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삼각김밥으로 익숙해진 맛에 김치가 더해지면 금상첨화였다. 무엇보다도 참치마요밥은 프라이팬을 쓰지 않아도 되어 뒤처리까지 덜 번거로웠다.


다른 음식과의 궁합 건강성은 계란의 압승으로 보인다. 계란은 인류의 오랜 식재료인 만큼 참치보다 다양하게 연계됐다. 특히 맵고 짠 음식에 계란이 더해지면 자극적인 것들이 맛있게 온순해졌다. 라면,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떡만둣국 등은 계란의 유무가 맛 표면의 질감을 곱게 다듬었다. 그러나 계란 때문에 국물을 더 먹게 되었다. 계란은 완전식품을 가장한 나트륨 흡수 도우미인 것이다. 게다가 쌈 앞에서 무능했다.


인스턴트 친화적 자취 식단에서 쌈밥은 건강 식단의 최후의 보루다. 밥을 한두 숟갈 줄인 만큼 채소를 보강했다. 상추나 양배추가 기본이었고, 가끔 호박잎을 먹기도 했다. 특별한 취향은 없어 시세에 따라 저렴한 것으로 먹었다. 황금빛 똥을 누려면 양배추가 제격이었지만, 양배추는 자르고 쪄야 하는 절차가 계란프라이보다 손이 많이 가서 같은 값이면 상추를 먹는 편이다. 양배추를 찔 때는 버섯을 함께 찌기도 했다. 쌈에는 양파와 고추가 옵션으로 딸렸고, 가끔 마트에서 보이는 대로 치커리나 미나리를 첨가하기도 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별을 숨기고 있어서고, 쌈이 맛있는 이유는 신선하고 푸른 채소 위의 뽀얀 쌀밥, 그 위에 곱게 놓인 참치 한 점 때문이다. 참치 쌈은 든든하게 먹어도 500칼로리 안팎의 건강 다이어트 식단인 셈이다. 물론 굳이 참치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육고기나 육가공품은 구워야 할 뿐만 아니라 칼로리도 높으니 쌈에는 굳이 참치여야 했다.



참치가 계란과 대립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지만 참치캔의 3/4이 비었을 때쯤 계란 하나를 풀어 참치와 섞어 굽기도 했다. 전처럼 구워 오므라이스처럼 밥 위에 올려 먹었다. 두 라이벌의 융합은 개별 맛의 단순합보다 고소했다. 참치와 케첩은 어울리지 않지만, 케첩은 계란과 어울린 덕분에 수분 빠진 참치의 퍽퍽함이 케첩의 달큰함으로 미장되었다. 씹히는 달큰함은 새로운 식감이었다.


어렸을 때 가졌던 작은 욕망 두 개를 이제는 일상적으로 실천한다. 하나는 쌈밥에 참치 살코기를 두툼하게 올려 먹는 것이었다. 참치 TV 광고는 어린 나를 제대로 저격했다. 어른이 되면 사고 싶은 장난감을 모두 사겠다는 다짐처럼 참치를 아끼지 않고 올린 쌈밥도 ‘어른이 버킷리스트’에 올려 뒀었다. 다른 하나는 고추 참치 하나로 밥을 비벼 먹는 것이었다. 고추 참치 하나를 온전히 먹어 본 적 없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고추참치 하나만 딸랑 들고 가도 친구들로부터 환대받았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나누었고 집에서는 동생과 나눠 먹어야 해서 한 캔을 온전히 먹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이루다’는 말이 민망할 만큼 일상적으로 먹고 있다. 새로 생긴 작은 소망이 있다면, 참치 좀 그만 먹고 싶다.


참치와 거리두기 할 시점이 오긴 했다. 22년으로 넘어오며 마트에서 할인 행사를 해도 150g짜리가 1750원이고, 200g짜리는 2200원이었다. 450원은 큰돈은 아니지만 25.8% 증가한 물가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하다. 당분간 계란을 더 많이 먹겠지만, 자취가 끝나지 않는 한 곧 참치로 회귀할 것임을 안다. 쌀밥을 끊지 않는 한, 이 단백질 파트너를 대체할 간편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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