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규 Jul 13. 2022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

열심히 읽고 열성으로 쓴 독후감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




나는 80년대에 교육대학의 학생이었고, 당시 우리는 <딥스>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실화를 소설 형식으로 쓴 <딥스>는 소년 딥스를 치료한 심리상담가 엑슬린 박사가 196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한국엔 80년대에 들어와 번역 소개되고 2000년대 초까지 수많은 다양한 버전의 번역본이 소개됐다. 이후 <한국의 딥스> 같은 아류작도 선보였지만 읽지 않았다.


교육대학생으로서 읽은 <딥스>는 나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국의 어린 아이고, 이미 내가 읽었을 때에도 20년 전 이야기였으며, 뭔가 장애물을 넘어 성공하는 흔한 스토리로만 기억한다.


2003년에 채영숙이 자신의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 호민이 양육기록을 책으로 낸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는 올해 그것도 몇일 전에 복간됐다. 출간 전 예약 구매를 해서 따끈한 책을 받았다. 처음 출판 당시 모르던 책이다.


쉬운 문장에, 장마다 짧고 다양한 에피소드의 연속이라 몰입해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는 읽는 내내 체온이 오르고 숨이 찼다. 한번은 왈칵 눈물도 쏟았다.(어떤 지점에서 눈물이 났는지 뒤에서 말하겠다)


이유는 분명하다. 호민이 성장기의 다양한 에피소드는 내가 다 겪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갑돌이가 떠오르고, 저 이야기는 길동이가 떠오르고.... 함께 지낸 나의 학생들에게서 직접 목격한 스토리라서 마치 내가 작가처럼 느껴진다.


일단 호민이를 나의 독후감을 읽는 분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책 속에서 부분을 발췌한다.



호민이는 18개월에 걸었고, 아기 때 옹알이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잠 잘 자고 순한 아이였다. 혼자서도 잘 놀았는데, 그림책보다는 주로 전화번호부나 신문처럼 글자가 깨알같이 박힌 것을 들여다보기 좋아했다. 텔레비전 광고를 너무 좋아했다.



18개월 이후 천방지축으로 돌변했다. 도무지 위험한 것을 몰라서 차가 가까이와도 피할 줄을 모르고 심지어 차도로 불쑥불쑥 뛰어들기까지 했다.



(취학 전) 호민이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마냥 울어댔다. 하루 종일 호민이 울음소리의 이유를 찾아내느라 동분서주했지만, 알아내기보다는 끝내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더 많았다. 낮에 제 욕구가 무시됐거나 양껏 채워지지 않은 날이면 어김없이 밤중에 깨어 울었다.



호민이도 유치원을 다니던 여덟 살부터는 소극적이나마 방어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방어라는 것이 귀찮은 아이들을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교실에 없을 때 아이들이 괴롭힌다는 걸 알고는 선생님 뒤만 졸졸 따라 다니기도 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귀찮은 친구들을 물리쳤다. 짓궂은 아이들이 다가오면 귀 막고 눈도 꼭 감고 “저리 가~~~!”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2학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오는 호민이에게 평소에 귀찮게 하던 아이가 다가가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신발주머니를 돌려 그 아이의 접근을 막으려던 것이다.



4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서 1, 2학년 여자아이들 머리를 손으로 친다는 얘기를 피아노 선생님한테 들었다. 선생님한테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도 호민이한테 맞았다는 소리를 여러 번 했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내 눈 앞에서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밀쳐버리고 그 아이가 울자 머리를 툭 치고는 내 눈치를 살피는 호민이를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를 해코지할 애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라 황당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도로에서 경찰관에게 신호위반으로 벌금 스티커를 발부받는 일이 있었다. 경찰관이 가까이 다가오는 일에 호민이는 무척 놀랐고, 자기 판단에 어린아이들을 때리는 일 때문에 경찰관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너 또 OO이 괴롭힐 거야? 한번만 더 OO이 안마해주면(공격하면) 경찰 아저씨가 호민이를 경찰차에 태워서 잡아갈 거야.”


“안 해요. 꼭꼭 약속해.”


좋지 않은 교육 방법인 줄 알면서도 가끔씩 경찰아저씨를 ‘팔아먹을’ 때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이 년 남짓 지속되던 호민이의 ‘친구 때리기 놀이’는 막을 내렸다.



(청년이 된 호민이는) 이제 자기의 요구사항 정도는 띄엄띄엄 언어로 표현을 하고, 싫으면 싫다 똑 부러지게 거부할 줄도 안다. 자존감이 커지고 자기주장도 생겼다.



위 책 내용을 부분 발췌한 것은 호민이의 성장기를 타임라인에 올려놓고 본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호민이가 나이를 먹으며 변화했다는 것이다. 보수적 시각에서도 호민이는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둘째는 호민이 변화의 추동력은 호민이 신체를 둘러싼 피부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호민이 상황에는 호민 이름을 부여 받은 어린 목숨과 함께 다양한 상대가 있었다. 엄마 아빠가 있었고, 텔레비전과 가구가 있었고, 그림책과 전화번호부가 있었고, 유치원 동무와 선생님이 있었고, 학교과 교실이라는 하드웨어와 교육과정 소프트웨어가 있었고, 피아노 학원이 있었고, 신발주머니가 있었고, 자동차가 있었고, 경찰관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언어라는 도구가 있었다.


호민이는 자율계를 장착한 생명이지만 호민이 밖의 사물과 타자로서 목숨들과 사회적 룰과 도구로서 언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존재를 드러낸다. 말이 어눌한 호민이는 유아교육기관에 놓였을 때부터 동료와 선생님에게 공격을 받았고, 때론 신체적 학대도 있었다. 호민이가 자신에게 작동한 학대의 다양한 양태를 나중에 주변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또래를 감당할 수 없으니 작은 체구의 어린 동생들을 괴롭힌 것은 호민이 입장에서 합리적이다. 즉 학습의 결과며 자아와 타자 사이 상호작용의 자연스런 과정이다.


억제해야하는 행동과 감정을 위해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기 억제와 도덕적 판단에 따른 제어는 엔트로피 증가를 되돌리는 일이라 에너지의 지속적 소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에너지는 밖에서 공급해야만 한다. 사람은 다른 생물과 다르게 엔트로피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를 통해서 문화를 쌓아왔고, 이는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는 법이다.


외부로부터 에너지의 공급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며 기호적이다. 즉 강제성과 상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교육이란 이름으로 포장한다.


호민이에게도 폭력적이고 기호적인 교육이 적용된다. 다만 호민이 경우 에너지 공급 루트가 특별할 수 있다. 마치 자동차 주유구가 운전석 뒤쪽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조수석 뒤쪽에 있다고 고집하며 있지도 않는 주유구에 기름 노즐을 쑤시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한편 휘발유 차량에 디젤 기름을 넣었던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 또한 소형 자동차에 대형 버스처럼 엄청난 양의 연료를 넣을 수 없는 법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나는 호민이가 대형버스라고 생각한다. 많은 연료를 넣어야 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다)


우주에는 적당의 법칙이 있다고 믿고 있다. 적당은 適當이며 또한 的當을 말한다. 적절하게 알맞으며 또한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적당을 위해서는 서로 다르다는 전제는 당연하다. 우주에 표준은 없다.


작가는 호민이를 통해 자폐성 장애인에 대해 세 번째로 알 수 있는 점도 기록하고 있다. 자폐성 장애인도 데이터를 축적한다. 즉 필요한 기억을 유지한다. 데이터라고 말한 건 기억을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활용한다는 뜻이다.





<자폐장애인도 과거를 기억한다>


밤 11시가 지나도록 잠을 안 자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호민이한테 어서 자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고 말한다.


“호민이가 잠을 안 자고... 엄마가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지?”


여섯 살 전에는 호민이가 한밤중에 자다가 깨어서 두세 시간씩 울어댈 때가 많았다. 달래다 안 되면 엎어 놓고 엉덩이를 세게 때려준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얘기를 하는 듯하다.



말이 없다고 해서 기억이 없거나 논리적인 생각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폐성 장애인에 대해 흔히 오해하는 점이다.


그리고....



"정상이라는 것이 이기적이고 부정직하고 남을 죽이고 총을 가지고 다니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면, 전혀 그런 상태가 되고 싶지 않아요." - 여성 자폐인 앤 카펜터의 말 (p. 564)



"신경정상증후군이란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집착, 우월하다는 망상, 관습에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특징으로 하는 신경생물학적 질환이다. 완치 방법은 없다." -신경정상인연구소 사이트Q&A에 있는 글 (p.568)


<뉴로트라이브>에서 소개된 말이다. 이 책의 부제는 "자폐증의 잃어버린 역사와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의 미래"이다. 신경정상(neurotypical)인연구소란 자폐성 장애인들이 비장애인을 조롱의 성격으로 붙인 이름이다. 참으로 탁월한 명명이다.


위 앤 카펜터의 표현은 이해되고 인정되며 마음 아프다.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에서도 “신경정상증후군”에 해당하는 에피소드가 소개됐다.



(초3 2학기 때 일)


아침이면 호민이를 데리러오는 아이들의 소리로 엘리베이터가 시끌시끌했다. 친구들이 도착하기 전에 호민이를 아파트 아래로 내려 보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호민이를 집에서 기다리게 했다. 아침마다 집에 오는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며 내 고마운 마음을 직접 전하고 싶었고, 더불어 칭찬 한마디씩 해주며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너는 눈이 참 크고 선하게 생겼구나.”


“너는 공부를 엄청 잘 한다지?”


“와~~ 헤어스타일 바꾸니까 더 멋있는 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순수하고 예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잠시나마 내가 어린 아이로 돌아간 듯 착각을 할 지경이었다. 그 즈음 나는 날마다 행복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이때 독자로서 나는 다음에 커다란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불쾌하고 화가 나는 일을....)


그러던 어느 날 빠뜨린 준비물을 전해주려고 호민이를 뒤따라갔다가 가슴 아픈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선 아이들이 내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호민이를 발로 차며 빨리 걸으라며 윽박지르고, 등에 멘 책가방을 주먹으로 힘껏 쳐댔다. 호민이는 겁에 질려서 소리를 질러대고, 아이들은 그게 또 재미있다고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고학년 아이들조차 말리는 아이 하나 없고 모두가 구경꾼처럼 지나쳤다.


그 중에 주동자격인 아이를 보며 난생 처음으로 아이들한테도 배신감이란 걸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마다 우리 집에 들러서 호민이가 신발 신는 것까지 도와주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늘 밝고 씩씩하고 목소리도 우렁차서 나도 내심 든든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어린아이가 참 착하고 기특하다 싶어 대견해하던 터라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나는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 앞에서는 그토록 선한 얼굴로 호민이를 도와주던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동안 호민이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보시라. 누가 과연 장애를 가지고 있는가. 호민이의 등교를 도와주겠노라 자원한 초등3학년 아이들이, 호민이 집 현관에서 호민이 신발 신는 것까지 돕던 아이들이 집을 나서고 나서 호민이에게 가하는 폭력의 모습은 충격이라고 말하며 그냥 넘어갈 일인가 보란 말이다.(이때가 2000년으로 짐작된다)


이로서 장애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지 증명된다. 이런 모습이면 장애인 것이고 저런 모습이면 정상인 것이란 구분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다만 권력의 작동일 뿐이란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제 내가 눈물을 왈칵 쏟은 지점을 말해야겠다.



(초등 2학년 때 일)


그 아이 이름은 김수영이었다. 그보다 몇 주 전에 교문 앞에서 수업 마치고 나오는 수영이를 처음 만났다. 같은 반 친구들이 어떤 애가 호민이를 매일 괴롭힌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수영이였다. 쉬는 시간이나 선생님이 없을 때 호민이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고, 주먹으로 배를 툭툭 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교실에서 친구들이 다 보는 가운데 호민이한테 바지를 내리라고 하고선 “고추 봤다!” 하면서 놀렸다는 말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교문 앞에서 여러 날 기다린 끝에 수영이를 만날 수 있었다. 얼굴에 흉터가 여러 군데 있는 것으로 봐서 한눈에도 사연이 있는 애란 생각이 들었다.


“너 왜 매일 호민이 괴롭히는 거니? 호민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니?”


“아뇨.”


“그런데 왜 호민이 때리고, 고추 보여 달라고 했니? 너도 여기서 아줌마한테 고추 보여줄 수 있어? 네가 창피한 일이면 호민이도 창피할 거라는 것 너 모르니?”


“잘못했어요.”


별로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 내가 다그치니까 마지못해 잘못했다고 했다.


“도대체 왜 호민이를 괴롭히는지 얘기나 들어보자.”


“아줌마가 맨날 학교 앞에서 호민이 기다려주는 게 부러웠어요. 친구들도 나는 안 좋아하고 호민이만 좋아해서.... 그래서 때렸어요.”


나중에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중략; 엄마가 집을 나갔고)


그런데 정작 아빠라는 사람은 집에서 아이를 어찌나 패는 지 수영이 몸에는 온통 멍과 흉터투성이고, 어떤 날은 학교 오기 직전에 아빠한테 맞아 얼굴에 손바닥 모양이 빨갛게 찍혀서 왔더라는 선생님 말씀에, 그 자리에 있던 엄마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진정 슬펐다. 수영이 스토리 말고는 가슴이 울렁이거나 코끝이 찡한 일이 없었다. 화가 올라오는 일은 있어도 말이다.


초등2학년 아이가 호민이가 부러워서 호민이를 괴롭혔다는 말이 너무 슬프다. 수영이의 마음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슬프다. 수영이가 호민이를 부러워하는 눈빛이 바로 내 앞에 보이는 듯하여 많이 슬프다.


그런데 슬픔은 힘이 세다. 슬픔은 모든 감정의 어머니다. 슬픔이 없는데 어찌 기쁨이 있겠으며, 슬픔이 없다면 분노도 없을 게다. 슬픔이 다른 감정도 배태했지만, 상처도 결국 슬픔이 치유하는 법이다.


호민이 엄마 채영숙 작가도 깊은 슬픔을 지나서 힘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럴 것이다.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는 힘을 준다. 힘이 필요하다면 <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를 얻으시라. 적당한 분에게 적당한 힘을 준다고 나는 확신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ADHD부모연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