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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Sep 26. 2023

걷기를 시작하다

2023.4.26(수)

숙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아침 8시 30분부터 걸었다. (세상에 커피를 국그릇 같은 보울에 따라준다^^)

커피양이 엄청나다. 맛은 준수한 편이다.

식사 자리에서 서로 여자 선생님 옆에 앉겠다고 두 아이가 충돌하면서 평화는 깨졌다. 


첫날은 빼어난 풍광을 얻는 대신 오르막을 서너 시간 걸어야 한다. 모든 순례꾼들이 힘들어 한다. 하지만 극한의 경사는 아니고 걸을 만하다.


작은아이를 달래느라 가방도 들어주고 당근을 제시하기도 하며 걸었지만 아침 식탁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결국 3시간 동안 7km를 걷고 멈췄다. 처음 만난 알베르게 bar에서 쉴 겸 점심 먹을 겸 배낭을 내려놓았다가 방을 잡아서 묵기로 한 것.


예전과 달리 숙소 예약 없이 방 구하기 힘들 것이라는 한국인 부부의 정보도 있고, 셍장에서 겨우 7km 떨어진 알베르게에 머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란 판단에 첫날 핑계로 짧게 걷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셍장에서 아침부터 걷기 때문에 메인 그룹과 떨어지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웬걸…. 첫번 째 알베르게부터 방이 없단다. 하지만 좀 기다려보라고 해서 한 시간 가량 대기하다가, “너는 운이 좋다. 예약 없이 방을 구하는 마지막 팀이 됐다”며 침대를 4개 내준다. 


어둑어둑한 방에 침대가 8개(이층침대 4개) 있는 방인데….. 가격을 확인하지 않은 불찰이긴 하지만 어제 묵은 호텔의 두 배 값을 치렀다. 저렴한 알베르게와 비교하면 4배에서 5배에 이른다. 여기는 저녁과 아침 제공이란 차이는 있다. 테이블에 화려한 그릇이 진열되는 것을 보니 디너를 얼마나근사하게 내놓을지 기대된다. (내 추정은 스페인은 알베르게에 보조금을 주지만 프랑스에서는 정부지원금이 없으니 비싼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촉으로는 이 집에서 머물지 않으면 오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기에 머물고 내일부터 20km 내외로 걷기로 했다.


“당신 이러다 죽어요. 걱정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최근 급격하게 늙는 것 같아”


우울한 나를 보고 아내가 걱정한다.


아이들을 위해 장도에 올랐는데, 오히려 여주집에서보다 상황이 나쁘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하나는 시차의 문제. 작은아이는 꼭 아기 잠투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다른 하나는 폰이나 패드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생기는 일종의 명현현상 같은 것….


그러나 추정일 뿐, 다 알 길이 없다.


작은아이 경우 2019년처럼 먼 나라의 오지에서 나하고 단 둘이만 살아야 할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서요 아서. 당신은 이제 늙었다는 걸 인정하세요”


아내의 말이다.


지금 고2 여학생이 초3 12월에 내게 와서 딱 12개월 살고 집으로 돌아간 경우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여자 아이를 돌본 적이 없는데 그 아이만 예외였다. 설득과 꾸중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독특한 아이였다. 


시기적으로 작은아이와 똑같다. 고2 학생은 현재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성장한 운동선수가 됐다. 나는 별로 영향을 끼친 것이 없고 뒤치닥거리 하다가 12개월이 지났지만, 나와 헤어지고 나서 운동에 전념하면서 좋은 성과를 보였다.


은하계 최강 자기중심적 행동을 보이던 아이가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했다. 부모의 헌신과 결정적으로 운동에 전념한 덕분이다.(이번에도 그 학생의 아빠가 전화했다. 페북 통해 활동을 잘 알고 있다면서 스페인 걷기 잘 하고 오라고….)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성장을 도모할까나….


일단은 장거리 걷기를 선택한 것인데, 초반부터 확신이 무너진다.


큰아이는 내년에 중학생이기 때문에 사춘기와 싸움이 시작된 느낌이다. 큰아이 사전에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양보=나의 손해> 공식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어서 대화를 통한 타협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란하다 심란해

와중에 어제에 이어 숙소의 풍광이 걱정거리를 날려준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첫날 여정에서 어떤 쓰레기(휴지, 과자껍질, 바나나/오렌지 껍질 따위)도 볼 수 없다. 일부러 쓰레기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았지만 끝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어제의 비현실적인 달력그림 뷰에 오늘은 웅장함까지 더해졌다.


분명한 팩트 하나를 확인했다.


두 아이는 아직도 서열 싸움 중이다. 


오래 전 강원도 오지에서 교환교사 생활하면서 젖소농장 옆에 살았다. 소들의 서열싸움은 치열하고, 결과에 대한 엄격함에 놀란 경험이 있다. 서열에서 밀린 소는 사료 조차 먹을 수 없었다. 힘 센 놈이 처절하게 응징하며 먹지 못하도록 덩치로 밀어버린다. 목장 주인은 약한 녀석을 별도의 우리에 넣고 따로 사료를 준다.


당시에 필요하다면 별도 공간과 먹이를 제공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쨌든 서열싸움이 끝나면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 아이는 양육자 어른의 콘트롤이 있기에 진검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진검승부라니…. 마치 짐검승부(짐승의 승부)처럼 느껴진다.


무엇이 아이들에게 All or Nothing의 도박판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지…. 


“얘들아, 사람은 서열싸움하지 않아. 짐승이나 하는 짓을 멈추면 안되겠니?”


(“선생님, 인간의 역사는 서열싸움의 역사라구요. 그걸 모르는 선생님이 한심하네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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