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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Sep 27. 2023

순례길을 길게 걷는 이유

2023.5.23(화)

작은아이는 부모님이 온전히 챙긴다. 나도 일부러 작은아이와 떨어져 다닌다.


자연스럽게 큰아이가 딱 붙는다.


큰아이는 손 잡고 걸으려고 하고, 걸으면서 오만 가지 질문과 의견을 말한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렇게 맘껏 질문하고 떠든 적이 없었을 것이다 수다를 떨려면 들어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 들어주는 일은 적지 않은 에너지를 써야한다. 듣는 일은 집중이 필요하다. 나에게 집중하지 않는 상대에게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스페인 까미노에서 걷기 때문에 길게 대화하고, 아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마침 5년 전 오늘 페북 포스팅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딱 오늘 내가 써야할 내용과 겹친다.


(징징이는 까미노를 내내 울면서 걸어서 내가 붙인 별명. 당시 중1 나이 소년)


//

스페인 순례길을 한달 가까이 어린 친구들과 걷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은 전략상 16km만 걷고 알베르게에서 쉬기로 했는데, 징징이가 4km를 남기고 태업을 한다. 힘들어서 더 못가겠다는 것. 적게 걷기로 했기에 일행에게 먼저 가서 숙소 잡으라고 하고 징징이랑 낮은 돌담 위에 앉았다.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앉아 있다가 누워도 좋을 자리라 누워 봤다. 


오호라~ 고개 들어 보는 하늘과 다른 하늘이 있다. 적당히 밝고 맑아서 편안하게 하늘과 마주한다.


징징이가 입을 연다.


"왜 여기를 걷는 거죠?"


또 그 얘기냐고 타박을 하니 그게 아니라.... 다른 질문이란다. 반가운 질문이다. 왜 (자기가 느끼기에)고생스러운 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걷는냐는 거다. 어제 포르토마린부터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산티아고까지 약 100km 남은 동네라서 4~5일 일정으로 걷는 사람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 온 중학생 무리도 있다.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할만한 내용도 없다. "글쎄 왜 걸을까. 힘들게 말이다"


징징이의 질문은 의미가 있다. 언제나 떠드는 얘기는 모두 자기 얘기다. 우리 엄마가.... 내 동생이.... 내 스마트폰은.... 우리 아빠 차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 이런 얘기다. 그런데 드디어! 내 기억에는 처음으로 자기랑 직접 상관이 없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질문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다. 대답이란 짝이 붙어서 한쌍이 돼야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대답은 필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답은 무엇이든 상관 없다. 질문만이 사고를 가동한다. 그것으로 질문은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징징이의 질문은 징징이가 자기 외부로 사고 작동을 한 걸 말한다. 사고의 확장이다. 질문 하나 때문에 다 용서했다. 한 시간 넘게 노닥거리다가 4km를 천천히 걸어서 일행이 먼저 도착한 알베르게에 닿았다.


난 이 길을 걸으며 아이들이 인생을 바꾸는 영감을 얻기를 바란 건 아닌지 자문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꼴랑 한달을 낯선 곳에서 걸었다고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없다. 번개 치듯 머리를 때리는 영감을 외부인이 주는 경우는 없다. 내가 지금 동행하는 아이에게 영감이든 개념이든 넣어줄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그러면 나는 왜 아이들과 스페인 순례길을 걷는가. (내 대답은 오해 소지가 있다. 그러나 교육에 관해 중요한 신념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아이들과 먼 나라에 와서 장시간 걷기를 하는 것은 여러 자질구레한 변명도 있지만 고갱이는 "함께 시간 보내기"를 하는 것이다. 방점은 "보내기"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 죽이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페인은 중요하지 않고, 까미노도 중요하지 않고, 걷기도 중요하지 않고, 숭고함도 필요 없다. 


아이는 함께 시간을 보낼 누군가가 필요하다. 자기에게 지식을 넣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가능하지도 않고)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면 되고, 그저 함께 하는 사람이 멘토다. 병실에 입원한 사람 곁에 붙어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곁에 있음"이다. 아픈 나의 곁을 언제나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힘을 준다.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직접 환부를 치료하는 건 아니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건 부모, 특히 엄마겠지만 아이가 엄마를 의사로 받아들이면 침대 곁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 '그분'은 없다.


선생은 미숙한 아이를 특정한 조작을 통해 성장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언제나 실패했다. 이제는 좀 깨달았기에 아이의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아저씨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최선이자 도달하기 힘든 목표다. 진짜로 쉽지 않다.


숲길을 걷다보니 산불로 나무들이 숯이 된 지역을 종종 본다. 스페인은 산불난 자리를 그대로 두는가 보다. 정비의 흔적이 없다. 오늘 지난 자리는 산불이 반 년 전에 난 것 같다. 소나무 군락지였나본데 타버리고 쓰러지고 시커먼 자리에 선명한 연두빛 어린 생명이 자라고 있다. 뭉클한 감동이 있었다. 그렇게 자연은 자연히 되살아나는구나 싶었다. 솔방울 안에 숨어 있던 씨앗이 폐허 속에서 피어나듯 아이들도 자신의 씨앗을 발아시킨다. 그때 믿고 지켜봐주는 사람, 여리여리한 연두빛에 감동하는 사람, 새 생명을 보고 내 생명이 스러짐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누구나 큰 사람으로 자란다. 그렇게 믿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산불이 난 자리에 새로운 싹이 터서 묘목이 됐다



//


징징이와 까미노를 걷던 때보다 1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전 4월에 여덟 명의 아이들과 오키나와 치유목장에 있었다. 호스테라피를 집중적으로 하려고 선택한 퍼포먼스였는데, 한 명의 초3 아이가 오키나와 생활만을 위해 참가했다.(여기서 동글이라고 명명)


동글이는 초1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동글이 엄마는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일을 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오후 시간은 잠실에 있는 상담치료센터에 다녔다. 편도 2시간의 거리였다(자가운전)


상담치료센터는 특별한 기계를 사용했다. 아이가 50분 동안 헤드폰을 쓰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데, 한쪽 스피커에는 정상적인 음악이, 한쪽 스피커에는 노이즈가 섞인 음악이 나온다. 그런 체험이 아이의 성장발달을 도모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이는 사실 50년 전에 미국에서 유행한 발달장애치료법이다. <치료>를 내세우는 건 발달장애를 없앨 수 있다는 발상이다. 당연히 미국에서는 없어진 매뉴얼이다. 


어쨌든 매주 2번씩 2년을 꼬박 다니고, 아이는 말문이 트였다. 어눌하지만 기본적 욕구에 대한 표현을 할 수 있고, 오키나와에서 지속적으로 한 아이를 놀리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동글이 엄마는 주2회 치료센터 참석 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주 굳게!


내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센터에 왔다가려면 모두 5시간이 걸리잖아요. 운전만 4시간, 센터에서 1시간. 동글이는 주2회 다섯 시간 동안 엄마를 독점적으로 곁에 두잖아요. 오가는 차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듣구요. 그 엄마의 목소리는 오직 동글이를 향하는 목소리잖아요. 센터에 다니는 시간이 아니라면 언제 엄마가 동글이에게 집중할 수 있겠어요. 평소엔 동글이에게 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오직 동글이에게 향하지 않고 허공으로 퍼지고 말죠. 오직 동글이에게 향하는 목소리란 동글이가 자신에게만 향하는 목소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동글이와 엄마 단 둘만의 시간 축적이 동글이의 말문을 터지게 했어요“



나도 큰아이에게 더욱 집중하고, 작은아이에게 아빠 엄마 모두 온전히 집중하는 <소중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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