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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Sep 27. 2023

어제도 오늘도 20km

2023.5.17(수)

감기에서 회복 후 어제 오늘 20km씩 소화했다.


여자 선생님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어린 친구들이 고생 많았다. 그래도 몸이 가벼운 아이들은 (아무런 짐도 없고) 어른보다 낫다.


여느 순례꾼보다는 느리지만, 열심히 걸어서 진도를 나갔다.


로마제국 시절 중요 도시였던 아스트로가(Astroga) 3km 직전까지 진출했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사람들은 모두 아스트로가까지 갔다. 


오늘 길은 지루한 풍광의 연속이었지만 두 아이들은 어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큰아이는 내 눈을 바라보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독화술(讀話術)을 사용해서 알아맞춰봐라‘는 듯 입술을 연신 움직이며 소리없이 혼자말을 한다.


숙소에서 조금 벗어나 바르에서 아침을 먹다가 큰아이에게 조근조근 잔소리를 하던 중이었다.


순간 큰 모욕감을 느꼈…지만,


나는 선생이니까…


일단 숨을 고르고 말했다.


“얘야.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야. 이건”


“뭐가?”


“나랑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는 듯 행동하면 오해를 살 수 있어. 누구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단다. 어른들끼리라면 싸우자는 도발이고 조롱행위가 되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모르지. 하지만….”


“모르면서 왜 내가 나쁜 말 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거지? 그건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잖아”


“네가 어떤 말을 했건 상관없이 네 행동과 태도를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방금 내가 욕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잖아. 나는 욕을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선생들은 나를 차별하는 거라구. 나는 그런 선생은 쓰레기라고 생각해”


다시 길게 호흡을 가다듬고….


“어쨌든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고, 더구나 타이밍이 네가 선생인 나에게 지적 받는 순간에 나온 것이라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어. 보여서는 안되는 태도야”


“그건 오해한 선생님의 문제야”


그리고는 똑같이 입술을 움직이며 내 눈을 바라본다.


.

큰아이는 내가 작은아이 손을 잡고 걷는 걸 무척 질투한다(큰아이와 손잡고 걷는 이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던 여자 선생님이 폭발했다.


“듣자듣자하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끼어드는데….!@$%^&**(()*&^%$%$…..”


결론은,


큰소리 나지 않았고, 웃으며 마무리했다.



순간 이유없이(아니 이유가 있다) 울컥한다.


아무런 제어가 없다면 눈물을 쏟았을 게다.


만약 내가 눈물을 보인다면, 선생으로서 진정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 조절 못하는 바보로 해석될 것이기에 재빨리 입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분위기를 연착륙시키려고 <겨울왕국> 얘기를 꺼냈다. 


여자 선생님이 <얼음공주로 살면 곤란하다>는 워딩을 썼기에 갑자기 떠오른 스토리가 <겨울왕국>


레릿고~ 레릿고…를 부르고 나서,(아는 가사가 ‘레릿고’ 뿐^^)


“겨울왕국 원제가 frozen 이잖아. 다 얼어버렸다는 거지. 모두 꽁꽁 얼어버린 세계니 우리말 제목이 <겨울왕국>인 건 자연스럽지. 주인공 엘사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특히 주변에 눈길이 가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초능력으로 스스로 자신을 가두잖아. 그런 엘사를 구원하는 건 동생 안나의 죽음이잖아. 물론 마법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긴 하지만. 나는 이제 오래 살았고, 엘사처럼 차가운 초능력을 가진 네가 따뜻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내 목숨을 마지막 제자인 너에게 주고 싶다. 그게 선생님의 소원이야“ 

말하면서도,


‘구라를 쳐도 좀 심했다’ 싶었다.


순간 선생 타이틀을 달고 산 짧지 않은 세월이 0.1초만에 몽땅 지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울컥했던 것.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오늘 저녁 숙소는 San Justo 마을의 Casa Tonete


까사로서는 저렴한 가격에 예약했는데, 와보니 그동안 숙소 중 호텔, 호스텔, 민박 중 최고다. 


라디에이터 빵빵하고(그동안 넘 추워서 감기가 잘 떨어지지 않았고, 큰아이도 기침이 남아있다) 방 네 개에 샤워실 2개, 완벽한 부엌과 세탁기까지….


우리 아이들 잠꼬대가 남달라서 알베르게 이용에 애로사항이 있었다. 알베르게와 민박, 호스텔, 에어비앤비를 번갈아 사용하고 있는데, 오늘 저녁 숙소에 아이들도 환호성을 지른다.


아스트로가 직전 마을이라는 핸디 때문에 저렴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4년 전 만났던 다비드를 다시 만났다

여기 오기 2km 전 언덕배기에 다비드(David) 아저씨가 운영하는 <순례꾼 음식나눔터>(내가 지은 이름이다)가 있다. 순례꾼이라면 마음껏 무료로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써놓았다. (한켠에 도네이트 돈통이 있다)


여기를 2019년에도 지나갔었고, 두 아이와 다비드는 사진도 찍었다. 다비드는 언덕배기에서 텐트를 치고 365일 머문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나눔터 뒷편에 흙집을 지었다. 오늘 악수를 했더니, 손바닥이 콘크리트 자체였다. 얼굴도 많이 상했더라. 


4년 전 사진이라고 보여주니 아주 반가워한다. 그때는 내가 신성우 닮았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 살짝 마음이 아프다. 다비드는 신의 뜻이라며 물도 나오지 않는 벌판에서 노숙하며 사는데, 


그것도 <시간죽이기>이겠지만,


나는 “신념 따위 개나 줘버려요”라고 늘 말하면서도 나부터 신념으로 시간죽이기만 하며 살고 있다.


왜냐면,


오늘 여자 선생님이 아내로 빙의하여 (평소엔 우린 의리로 뭉친 동지^^) “이제 제발 그만 두시오”하길래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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