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단련으로 깨우친 인생의 기본기 수업
<목표는 천하무적>을 읽고
#우치다에 이어 박동섭을 만나다
2007년 1월에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책을 낸다. YMCA 초청 강연에서 말한 내용을 중심으로 다듬고 추가하여 <하류지향(下流志向)> 제목으로 출간했다. 부제는 ‘배우지 않는 아이들 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다. <하류지향>은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국내에서 발빠르게 번역 출간했다. 같은 제목에 같은 표지 디자인으로 같은 해 10월에 번역본이 나왔다.
나는 2007년 2월에 공교육 초등교사를 그만두고 비제도권 교육판에 나왔다. 제도학교가 품을 수 없는 아이들이 있지만, 아무도 고민하지 않아서 ‘내가 고민하고 행동하자’는 마음이었다. 중등은 상징적으로 간디학교가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선택할 수 없고, 초등 어린이를 위한 비제도권 학교는 없었기 때문이다.
초보 대안교육 교사로서 나는 헤매고 또 헤맸다. 아이들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실존을 건 고민은 매일 이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읽은 <하류지향>에 감동했다.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모두 해명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도대체 우치다 타츠루는 누구지?’
그러던 차에 또 다른 은혜로운 책을 만났다. 오자와 마키코 선생이 쓴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를 읽고 감격했다. 마르크스 심리학을 일본에서는 사회심리학이라고 부르고 학회도 있는 걸 비로소 알았다. 심리학이 기업과 자본주의 정부를 뒷받침하려고 탄생한 젊은 학문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뿌연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오자와 마키코 선생을 초대해서 강연을 부탁하려고 했다. 먼저 번역자 박동섭 교수를 만나러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박동섭은 부산 신라대 교육학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2011년부터 박동섭은 내 스승님이 됐다.
#<목표는 천하무적>이 번역되기까지
2010년에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무도적 사고(武道的 思考)>를 출간했다. 여러 군데 발표한 짧은 글을 묶었다. <무도적 사고>를 일본 출간 직후에 박동섭 선생이 읽었다. 짐작하건데 내가 만난 <하류지향>이 박동섭이 만난 <무도적 사고>와 같을 것이다.(실제로 <목표는 천하무적>에 <하류지향>의 내용이 일부 들어있다) 박동섭 선생은 2012년 민들레출판사에서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를 번역한다. (원제는 ‘선생은 훌륭하다’) <스승은 있다>는 대박이 나서 불문학자 또는 레비나스 전공 철학자인 우치다 타츠루가 한국에서는 교육학자로 널리 알려진다. 2012년 이후 매해 빠짐없이 우치다 선생이 방한하여 강연회를 가질 때마다 주 청자인 교사들이 교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우치다 선생에게 묻곤 했다.
<목표는 천하무적> 옮긴이의 말에 박동섭 선생은 처음 <무도적 사고>를 만난 이후 국내에 번역 출간을 계속 타진했다고 한다. 어떤 출판사도 응답하지 않더니 올해 유유출판사가 무도적 사고로 결단을 내려 <목표는 천하무적>이 탄생했다.
내가 2007년 말에 <하류지향>을 만난 것처럼, 박동섭 선생이 2010년 <무도적 사고>를 만난 것처럼 <목표는 천하무적>을 만난 독자 당신도 신체를 때리는 강한 진동에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서론이 길었다.
#<목표는 천하무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74쪽에 있는 다음의 구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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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능력이란 구체적인 일처리 능력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슬픔과 괴로움을 듣는 힘이다. 춥다느니 피곤하다느니 배고프다느니 졸리다느니, 그리고 누군가가 안아 달라고 하는 무언의 호소를 감지하는 힘 말이다.(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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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합기도)를 수련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할 때, 과연 ‘힘’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우치다 선생의 응답이다. ‘힘’은 ‘감지하는 힘’이다.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우치다 선생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려면 스스로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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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은 ‘당신의 메시지를 이해했다’가 아니라, ‘나는 당신이 보낸 메시지의 수신처’라고 자칭하는 것이다.(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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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생(교사)로서 올바른 위치에 서려고 할 때, 마음으로 되뇌는 진언 같기도 하고 만트라 같기도 한 문장이 있다. “콘텐츠는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구조만 전달될 뿐” 이해의 대상으로 메시지는 콘텐츠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교사로서 학생에게 콘텐츠를 전달해서 ‘이해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예전의 나는 그랬다. 30년 넘게 그랬지만 한번도, 단 한번도 콘텐츠가 나에게서 떠나서 학생에게 닿고, 학생의 머리에 들어가서 이해되고 소화돼서 영원히(잠시라도) 머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조는 다른 얘기다. “나와 너가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있고, 나는 너하고 이어짐을 알고 있고(받아들이고) 네가 나에게 신호를 보내면 나는 수신할 준비가 돼있다는 걸 너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오직 이것만 가능하다. 즉 “받을 준비가 끝났어”하고 외치는 것만 가능하다. 먼저 수신자로서 송신자에게 수신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로 비로소 구조가 완성된다. 이것이 구조화 이전과 이후의 차이다.
당연히 교실에서 학생의 구조화도 필수다. 학생이 “저 수신할 준비가 끝났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데(입장이 아닌데) 어떤 콘텐츠도 의미가 없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콘텐츠가 이동하여 교사의 뇌에서 교사의 혀를 통해 공기의 진동을 일으켜 파동 신호가 학생의 귀를 통해 뇌로 들어가는 영상은 있을 수 없다. 수신할 준비가 끝난 학습자는 자신이 콘텐츠를 생산한다. 결국 콘텐츠를 발신하는 교사는 없다. 모두가 배우는 자, 학생일 뿐. “자, 준비가 끝난 사람은 잘 받아라”고 말하는 교사가 있다면 이제 미몽에서 깨어나 계몽돼야 한다.
무한대의 우주 어디에서라도 날아오는 전파를 잡을 요량으로 설치한 거대 전파망원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의미가 없다. ‘바로 너’에게서 날아오는 전파를 잡을 준비가 끝났다는 위치 선정이 필요한다. 마음의 위치를 말하는 거다. <목표는 천하무적>은 그런 말을 하려고 쓴 책이다. 나는 이러한 콘텐츠를 우치다 선생과 박동섭 선생에게 수신자의 준비 완료를 전달하여 스스로 생성했다.
#제발 민주시민교육을 잊지 말기를
이반 일리치의 학교는 군대와 감옥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분석을 따른다해도, 앞으로도 군대와 감옥의 구조를 따르는 학교를 인정할 수 없다. 나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내 바람과 상관없이 학교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다만 급격한 붕괴는 많은 희생자를 만들기 때문에 벽돌과 콘크리트 더미에 깔리는 억울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치다 선생도 그런 마음일 것이라 확신한다. ‘달리면서 고장난 버스를 고치는 것’이라고 우치다 선생이 교육문제를 언급한 것이 증거라고 생각한다.
다음의 구절은 매우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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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소비문화 속에서 해체된 중간공동체를 재구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민적 과제이다.(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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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학습을 간 학생들이 놀이동산 계단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진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혼자 놀이에 빠진 아이가 친구를 오프에서 만나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알고리즘에 빠졌다가도 만나서 소통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우치다 선생은 간절한 표정으로 말한다.(나는 그렇게 느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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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소비사회를 설명서 소비사회의 감각을 연마해 온 젊은이들이 상거래라는 틀에 준거해 ‘권리는 무진장 많고 의무는 없다시피 한’ 내셔널리스트 옵션을 선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p.99)
한편 애국자는 이와 반대의 여정을 밟는다. 애국자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고, 자신이 현재 귀속된 집단의 수행력을 높이는 데에 마음을 쓰고, 이웃에게 경의를 표하며,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묵묵히 수행할 책임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젊은이는 가능하면 애국자를 목표로 살아갔으면 한다.(p.100)
#육예(六藝)
어린 목숨이 성장을 위해 배워야 하는 여섯 가지 덕목은 (내 기억에) <교사를 춤추게 하라>에 나온다. <무도적 사고>에서 먼저 사용한 개념을 <교사를 춤추게 하라>에서 자세히 다룬 것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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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말하기와 셈하기만 배우면 세속의 볼일을 보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렇지 않은 세계의 존재(이를테면 죽은 자)와는 소통할 수 없다. ‘글로벌화된 세계’에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눈에는 ‘예악사어서수(육예(六藝); 禮 樂 射 御 書 數)’가 모두 ‘비즈니스’로만 보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장례나 음악의 영적 의미를 말하는 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다. 하지만 교육이 지금 이대로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아이들은 ‘초월적인 존재’와 관계 맺는 방법도, 시간의 흐름을 넘나드는 방법도, 자신의 몸과 대화하고 종족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법도, 그 어느 것도 체계적으로 습득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성인이 되고 말 것이다.(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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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는 제례를 말한다. ‘예’는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이는 타자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인간 고유의 특징이다. 우치다 선생은 <레비나스 시간론>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에서 타자의 본질은 사자(死者)라고 말한다. ‘악’은 음악이다. 예술 장르에서 음악은 시간의 흐름에 기반한다. 현재만 가능한 물리적 상황의 인간이 지나간 시간을 길어올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와서 파악(把握)하는 행위가 음악이다. (이런 우치다 선생의 음악에 대한 해석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사’는 활쏘기다. 운동으로서 활쏘기에서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하는 마음의 집중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어’는 말타기를 말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과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우치다 선생이 해석했다. 지난 10년 동안 호스(horse)테라피를 교육과정의 중심에 두고 고민한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언급이다. ‘서’와 ‘수’는 글쓰기와 셈하기를 말한다.
6예의 현대적 해석은 재해석이 아니라 올바른 해석이다. 학교든 아니든 6예를 배우고 익히는 기회가 중요하다. 그에 대한 우치다 선생의 다음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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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등급’부터 매긴 다음 상위 등급 아이에게 교육 자원을 집중하고 하위 등급 아이에게는 벌을 주는 시스템에서는 잠재된 재능이 꽃필 수 없다. 실제로는 모든 아이가 저마다 훌륭하고 개성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이란, 쓸데없는 것을 다 제거하고 말해 보자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교육상의 자유재량권’과 ‘교육 성과가 어느 날 발현되기 만을 기다리는 여유’다. 한마디로 교육 방법의 자유와 시간적 여유다.
아이들의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상대적인 우열을 논하지 않는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교사에게도 아이에게도 학교는 상당히 기분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pp.130~131)
#존재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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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에서는 종종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의해 현실이 바뀐다.(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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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것들-레비나스 사상에서 핵심적인 사자(死者)의 개념이다. 위 6예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죽은 자와 의례를 갖추어 커뮤니케이션한다. 죽은 자는 과거의 시간이다. 레비나스에게 시간은 현상학으로 자연스럽게 초대된다.
최근에 우리는 한강 작가의 여러 작품들에서 (특히 <작별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사자 개념이 문학작품으로 현현되는 걸 확인했다. 한강이 한림원 연설에서 한 말-“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는 레비나스 사상의 핵심이다. 우리는 한강 작가 덕을 톡톡히 본다. 어렵다는 레비나스를 이렇게 쉽게 풀어내다니.... 문학의 위대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은 상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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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순서를 틀려선 안 된다. 상상한 것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상상하는 행위가 있었으므로 실현된 것이다. 진리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다. 숙명도 그렇다. 숙명이란 자유롭게 공상하는 사람의 몸에만 찾아든다.(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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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평화를 상상해야 한다. 21세기도 중반에 들어서며 미사일로 대량살상이 일어나고 AI가 피아를 구분하고 적을 척살하는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수라도로 회기하리라 상상했겠는가. 그러나 역으로 상상하지 않아서 이런 지옥이 다시 번진 것이다. 끊임없이 상상해야 실현되고, 꿈도 상상이라는 액션을 통해 구축된다. 그러니 상상의 힘을 기르고 상상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 공공의 목표여야 한다.
결국 노래하고 춤추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하는 예술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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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武人)이란 ‘지금 수중에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보는 사람’이다. 늘 싸움터에 임하는 마인드란 ‘있는 것’을 돌려쓰며 임기응변하는 것이다.(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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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탓하지 말고, 핑계 대지 말고 있는 것을 돌려쓰며 ‘지금 바로 여기’서 할 수 있는 예술을 구현하는 것-그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내가 수신한 우치다 타츠루의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