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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내 아이의 미래는 운명의 영역입니다

  어제 오전에 강의를 해달라며 제가 있는 공간으로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강의료도 지불하겠다고 하니 나름 열강을 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이들 만나는 것이라 역시 주제는 "아이들에 대한 이해"
잔혹 동시로 불리는 이순영 어린이의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실마리로 아이들이 왜 엄마를 증오하는 시대에 살게 됐는지, 메리토크라시 사회의 한계와 자기 교육만이 가능하다는 명제의 의미 등을 떠들었는데, 역시나 올 것이 오고야 맙니다.

"강의는 잘 들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결국 엄마인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일단 한숨 쉬고 대답했습니다.

"종교생활을 하면서 구복(求福)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식이 일류대학 나와서 험한 일 안 하고 돈 잘 벌고 남의 신망과 부러움도 사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욕망입니다. 그러나 내 아이가 부모의 바람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는 것은 운명의 영역입니다. 바람대로 될 수도, 바람과 어긋나게 될 수도 있어요. 잘 되거나 아니면 못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언뜻 보아 농담 같지만 오직 이것만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듭니다. 다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도록 제도가 뒷받침돼야겠죠.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그 사회는 빠르게 멸망할 겁니다. 실패한 자가 위대한 까닭이 여기 있어요. 반드시 실패한 자가 성공한 자와 함께 있어야 상생이 가능한 겁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인생을 운명에 맡기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이런 메시지를 아이에게 주는 것이 할 일의 전부입니다. '네가 하는 얘기를 엄마(아빠)는 언제나 귀 기울여 듣겠다' '엄마(아빠)는 죽을 때까지 네 얘기를 잘 들어서 네가 외로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뜻만 전달하면 돼요. 오직 그뿐입니다."


  지금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들은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것(Es/It)은 없고 나-너의(Ich und Du/ I and You) 짝으로만 존재한다는 마틴 부버의 혜안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나 따로 너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망가졌습니다. 나를 가능하게 하는 너가 되는 최초의 존재가 엄마(아빠)입니다. 엄마 아빠가 아닌 할머니 고모 이모 모두 '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생활하는 엄마라서 내 아이의 '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너'가 될 수 있기에 엄마일 수 있다는 사고 전환이 필요합니다. (201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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