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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의 거울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존재는 누구인가

by 박달나무


1.


김인규 선생님의 <진우의 거울>을 지난 목요일에 받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분량이 적당하다는 이유와 글이 맨질맨질하고, 내용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사람은) 무엇에 감동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에세이 작품이다.


그런데 ‘과연 답을 누가 주는 것인가‘ 질문이 뒤를 잇는다.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다. 감동의 내용도 강도도 다르다.


책(저자)이 감동을 “주고” 독자는 감동을 “받는가” 이것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2.


진우는 (진우 씨라고 해야 하지만) 내 딸과 동갑이다. 97년 생. 진우가 고등학생 때 김인규 선생님 집 방문 때 만난 적이 있다. 손님인 내게 인사도 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해 보이지만 전형적인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보였다. 실제 만난 건 잠깐의 조우이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진우의 소식을 페북을 통해 듣고 있었다.


이를테면 진우가 기차를 좋아하고, 구경을 넘어 (아빠와 함께) 실제 기차여행을 즐기고, 혼자서도 가까운 장소를 기차로 왕복할 수 있게 발전(변화)했다는 것. 혼자서 물을 끓여 라면을 조리하도록 아빠가 가르쳤고, 안심하고 혼자 라면을 끓여먹도록 허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 지역(충남 서천)의 장애인 행사 사회를 보는 쾌거를 보여줬다는 것 등등.


다만 그것 뿐. 내 삶에 김인규 선생님과 진우 씨는 어쩌다 페북에서 만나는 드라마 등장인물 같이 쉽게 휘발하는 스토리 속 존재일 뿐 연결된 끈은 없었다.


3.


책이 끈이 됐다. <진우의 거울> 에세이 책이 진우와 김인규 선생님과 나를 이었다.


처음에 발달장애 막내 아들을 받아들이기(인정하기) 힘들었다가, 장애의 옷을 벗기겠다는 아빠의 헌신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 예술가 아빠와 발달장애인 아들 관계에서 각자의 예술 세계에서 서식하는 평등한 존재가 되기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을 담담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평등한 존재 관계는 평범하지 않다.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실상 영원히) 서포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평등하다면 서포트가 필요없거나 적어도 상호간에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빠가 진우에게 일상의 몇 가지는 버팀목 역할을 해야함에도 평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4.


내용이 감동적이란 말은, 책이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라는 것과 일방적인 지원과 평등한 관계가 모순이 아니라는 통찰에 있다.


하나더, 책이 감동을 주고 나는 감동을 받는 구분은 인위적으로 강제된 개념임을 깨달은 것이다. <진우의 거울> 책과 독자 A, 독자 B, 독자 C의 결합으로 세 순서쌍이 탄생한다. 존재는 책만으로도 독자만으로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순서쌍으로만 존재 가능하다. 그러니 독자마다 감동의 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었지만, <진우의 거울>을 읽고서 명확하고 선명해졌다. 진우와 아빠 김인규가 순서쌍으로 묶였기에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 지원을 한다”는 말이 폐기된다. 내 팔다리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나에게 봉사하니, 나와 내 팔다리는 불평등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5.


내가 주목한 대목을 소개한다.


——


*사람의 마음은 결국 희망을 향해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p.33)


*교만했던 셈이다. 장애 아동을 만날 때 나에겐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성급함이 있었고 그것은 비장애인의 자만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는 사람이고 그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단정 같은 것이 앞서 있던 셈이다. 그러나 장애 앞에서 그들이 아닌 내가 오히려 무지했던 것이다.(p.108)


*포기를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면서 그것을 유지할 이유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는 순간 진우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 또한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p.110)


*미래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자고 마음먹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게 진우의 모습이었다. 진우는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늘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하며 그 즐거움을 누렸다.(p.117)


*한동안은 발달장애 아동들과 미술 활동을 하면서 내가 그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벽에 부딪혀 좌절하곤 했다.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아이들 앞에서 무너졌던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없는 것과 무관하게 자신의 영역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잘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p.127)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즐겁게 살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굳이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해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무언가 해낸 사람에게는 성공 신화를 씌워 추켜세운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달장애인을 통해 배웠다.(p.148)


*공부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은 배워서 익혀야 하는 영역의 길이고 다른 한편은 스스로를 찾아 나서는 자기 영역의 길이다. 전자가 타인과 세상의 영역 속에 자리 잡는 일이라면 후자는 바로 그 자리에 서는 자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 교육은 자신의 영역이라고 형성하는 일보다는 타인의 세계 안에 자리 잡는 일을 향해 더욱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p.174)


*진우가 바람같구나… 자유롭고 상쾌하게 돌아다니며 한 곳에 집중하고 머무르지 않는 것. 순간순간 예리하고 관찰력도 뛰어나고 기억력도 있지만 오래 집중하지 않는다. 우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겠다. 바람이 머무른다면 그건 이미 바람이 아닐 테지만.


-과잉행동장애 때문에 진우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다. (중략)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은 진우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진우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만난 조은정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줄곧 진우를 맡아 주셨는데, 진우가 5학년일 때 안타깝게도 암으로 돌아가셨다.(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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