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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주실 수 없나요

아홉째 날 전북 무주군 무주덕유산리조트

by 박달나무

무주리조트에 왔다. 헤아려보니 무주리조트가 문을 연 것이 27년 전이다. 항상 강원도 스키장만 다니다 무주에 스키장이 생겼다고 해서 경부고속도로 영동 IC를 빠져나와 구불구불한 길을 2시간 가까이 달려간 기억이 난다. 오늘 와보니 요즘 욕을 바가지로 먹는 부영이 인수했더라. 무주덕유산리조트로 이름도 바꿨다.
콘도는 참 많이 낡았다. 27년을 버틴 화장실 문짝은 보기 안쓰럽다. 지금은 필요 없지만 콘도에 에어컨이 없다.(물론 우리가 에어컨 없는 방에 들어왔겠지 싶다)
하필 곤돌라 안전점검이라 운행하지 않는단다. 곤돌라 타고 설천봉에 올라 30분만 걸으면 최고봉인 향적봉(해발 1614m)에 오를 수 있다. 그걸 바라고 초등 꼬맹이들 데리고 1박으로 온 건데.... 창년 우포에 가는 길에 중간 기점으로 들러 쉽게 향적봉에 오르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할 수 없이 슬로프 경사를 오르내리는 산책을 했다. 놀다가 장난하다가 걸으니 3시간이... 지나갔다. 아이들 산책으로 충분하다. 경사도 적당했고.
비수기에 평일이라 콘도 손님은 거의 없다. 산책하는 사람도 전혀 없다. 운영하는 식당도 하나 없다. 옛날 티롤호텔을 기분 좋게 이용한 기억이 있는데 현재 운영하는지 모르겠다.
호텔? 하고 떠오른 게 있다. 서른에 잔치를 마친 분이 56세가 돼서, 자신에게 방을 제공하는 특급호텔(반드시 수영장이 있는 호텔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이 있다면 감사하게 이용하고 호텔 홍보를 열심히 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단다. 어! 그거 재밌다.
우리는 서울 송파동에 70평 규모의 공간을 갖고 있다. 월세 못 낸 지 꽤 됐지만 어쨌든 아직은 계약기간이 1년 좀 넘게 남아있다. 하지만 상가건물의 한계 때문에 8월에는 일본 목장에 다녀오고, 9월은 주유천하 프로젝트로 국내 여행을 다니고 있다. 10월부터는 적절한 시골의 공간에서 크리스마스까지 붙박이로 지내려고 생각 중이다. 적절한 장소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제주도가 유력하지만 제주도는 걷기와 오름을 빼면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여기 좋다. 스키 시즌 시작 전(12월 중순)에는 콘도가 텅텅 빈다. 오늘도 크게 할인을 받아 저렴하게 이용 중.... 30년 가까이 된 리조트는 낡은 점도 있지만 반대로 매우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알프스 산에 들어와 있는 느낌은 마찬가지다. 비수기에는 온갖 향락시설도 운영하지 않는다. 정말 조용하고 안전하다. 드넓고 쾌적하다. 다양한 수풀과 가을벌레와 파란 하늘이 조화를 이룬다.
추석 연휴 후에 10주 동안 우리에게 방을 하나 제공한다면 무주리조트의 빼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어린 목숨들이 뿌리가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홍보해주겠다는 메일을 보내야겠다. 참말로~
여러분~ 무주리조트로 오세요~~~ 이렇게 말이다^^ (2017.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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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울 송파구에서 초등학생 어린이들과 기숙하면서 공부하는 초등 대안학교 지지학교에서 일하는 박준규입니다.
우리는 대도시 도심지 상가건물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9월 5일부터 말일까지 <주유천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자연환경이 좋은 곳을 골라 연속적으로 이동하며 공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지난 13~14일 어린이 6명 교사 2명이 1박 2일로 ○○리조트 개나리 2동 603호에서 묵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리조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이었습니다. 처음 계획은 곤돌라를 이용해서 설천봉에 올라 짧은 시간에 향적봉에 도달하는 것이었지만 제가 홈페이지를 확인하지 못한 불찰로 곤돌라 안전점검 기간인 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메뚜기가 뛰어노는 슬로프 풀밭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려 3시간을 놀았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친구들인데, 3시간을 지루한지 모르고 논 것은 의미 있는 활동입니다.

개나리동 앞의 작은 놀이터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은 놀이터로 달려가 한참을 놀다가 들어와서 밥을 먹었습니다. 당연히 꿀맛이었습니다. 평소에 아침밥은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이었거든요.
지금은 ○○를 떠나서 창녕의 우포늪생태촌 유스호스텔에 있습니다. <주유천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우리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계속 숙소를 달리하며 여행을 하기 때문에 비용의 부담이 큽니다. 가끔 지인의 소개로 무료 숙박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숙박료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25일 여행을 진행하자니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이상적인 ○○리조트를 1박만 한 것도 비용의 문제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적으로 안전하고 의미 있는 장소가 많지 않다는 겁니다. ○○리조트는 국립공원 △△산 자락에 워낙 넓게 자리 잡았고, 차량이나 야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하이킹이나 트레킹은 물론 생태교육을 테마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부탁을 드립니다. 추석 연휴 직후 10월 12일부터 11월 말까지 두 달 동안 콘도 한 실(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우리가 묵었던 개나리 2동 603호 규모라면 만족합니다. ○○리조트의 빼어난 자연환경과 인프라를 배경으로 친환경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특히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교육활동이 곧 치유의 길이라는 걸 알리는 계기로 삼고 싶습니다.
요청을 받아들여주신다면 우리도 나름 보답을 하겠습니다. 리조트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교육활동을 매일 블로그 콘텐츠로 만들겠습니다. SNS에 올리고 ○○리조트 홈페이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족단위 여행객에게 ○○리조트가 가지고 있는 메리트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천혜의 자연과 인공 디자인 공간이 시너지를 일으켜 어린 자녀에게 최적의 교육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연락처는 010 2301 xxxx입니다. 귀사의 긍정적인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리조트가 문을 연 1990년부터 겨울 시즌마다 애용한 저는 어떤 결과를 통보받더라고 ○○리조트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9월 15일
박준규 드림


추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데 방금 전 답신이 왔다. 전화로.

절반의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고, 목소리 톤으로 직감적으로 결과를 알았다. 방 제공이 어렵다는....
팀장이라는 분은 오너도 리조트에 머물면 비용을 100% 지불한다고 말하더라. 기업의 내규도 있고.... 그래서 청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청탁이 거절됐지만 기분 좋다. 거절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말투와 보이지 않는 전화지만 그의 태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척 미안해하며 직원용으로 비성수기에 사용권이 있는데 며칠은 자기 지분으로 방을 내주겠다고까지 말한다.
무주리조트는 처음에 쌍방울이 리조트 사업을 진행하고 1990년에 문을 열어 97년엔가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도 치른 종합리조트다. 아마 스키점프대를 처음으로 설치한 걸로 안다. 1990년에 방문했을 때 대형 광장 같은 초보자 슬로프의 규모에 입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2.4km의 "서역기행" 코스는 당시에 최장의 슬로프였다. 여기서 아들도 연습시켰고, 너무 어린 딸은 안고 여러 번을 내려왔다.
그 후 쌍방울이 망하고 어디로 표류했는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방문으로 부영건설을 모기업으로 하는 부영그룹에서 인수했다는 걸 알았다. 귀여운 원앙 그림의 회사 로고로 인지도를 쌓은 부영건설은 오너가 1조 원 클럽에도 들었고 재계 순위 22위로 상당한 규모로 컸다. 상속형 부자가 아닌 자수성가형에서는 자산 1위라고 한다. 최근 부실 건설회사의 대명사로 전락한 것은 유감천만이긴 하지만 이런 기업이 더욱 건실하고 투명한 경영으로 오뚜기처럼 존경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회사가 무주덕유산리조트 객실팀장에게 포상하길 청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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