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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실화냐

열 번째 날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

by 박달나무

아이들은 눈 뜨자마자(아침 6시경) 콘도 인근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더라. 무주덕유산리조트 콘도에서 10시쯤 나왔다. 우리의 행선지는 우포늪 생태촌 유스호스텔~
아뿔싸.... LPG 차량인데 어제 충전을 하지 못했다. 눈금이 'E'에 가깝더니 급기야 연료 부족 경고등까지 들어온다. 일단 충전소를 찾았다. 갈 필요가 없는 충북 영동으로 들어간다. 행선지 창녕과 반대로 가는 거다.
이런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엉뚱한 곳을 경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기회가 생긴다는 믿음이 있다. 오늘도 그랬다. 좀 많이 슬프지만 하나의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노근리평화공원' 이정표가 나왔다.
'아~ 노근리.... 학살현장... 평화공원도 조성됐구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이들과 함께 노근리 역사현장을 둘러보기로~
안내에 따라 먼저 영상관에서 기록물을 봤다, 애니메이션으로 인트로를 만들었다. 허걱~ 순간 내가 경험한 일이 나오는 착각에 빠졌다.

1950년 7월 25일 영동의 양민에게 미군은 폭탄 투하와 기총소사를 하더니 7월 26일부터 노근리 쌍굴로 몰린 300여 명의 비전투 남녀노소에게 3박 4일 동안 기관총을 쐈다고....
노근리 학살을 고발하는 영상은 인트로에서 울어대는 아기를 아비가 물 고인 구덩이에 빠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울음은 멈췄지만 아비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곧이어 아비에게 날아온 총탄이 몸을 관통한다. 이런 과정을 숨어서 보는 어미의 표정은 마치 정지화면 같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고 담임에게 신년인사를 가겠다는 날이었으니 1982년 1월 2일이나 3일이었다. 아침상을 치운 엄마가 나를 불렀다. 겨울방학이라 집에는 엄마와 나만 있었다.
"이제 우리 막내가 많이 컸으니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해줘야겠다. 너는 형들과 달리 생각이 깊으니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아버지나 형들에게도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다-엄마가 살아온 세월을 전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꺼낸 엄마의 라이프스토리는 너무도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26년 범띠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진회사(오늘의 저축은행 같은 제3금융회사)에 취업한 일부터 얘기는 시작됐다. 곧바로 8.15을 맞았고, 격동의 시간을 서울에서 겪었다. 원치 않은 결혼과 가평에서 신혼생활, 남편의 타의에 의한 월북, 친정아버지의 좌익 딱지와 해방정국에서 좌불안석, 서북청년단에 의한 목숨의 위협과 6.25 발발, 목숨을 건 피난생활과 딸의 죽음, 젊은 홀몸의 여성으로서 고난과 학질에 의한 죽을 고비, 전쟁의 한가운데서 내 아버지의 만남, 내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새롭게 겪어야 하는 고초들, 서울로 복귀와 미군의 만행, 이승만의 어이없는 조치들, 4.19 젊은이의 죽음과 부상, 박정희와 연좌제에 따른 고통들..... 모두 어린 고등학생으로서 소화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열심히 들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마치 6.25를 겪은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고1 때 한국의 유명 전후 문학 작품을 거의 다 읽고 작품마다 깊이 토론했던 경험과 바로 내 어머니의 증언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피난행렬에 쏴된 미군의 기총소사와 폭탄 투하의 아비규환(몸뚱이가 잘리고 팔다리가 흩어진 폭격현장에서 엄마는 살기 위해 뛰었다고 했다)과 한밤중 소리 죽여 도강하는 과정에서 아기가 우니까 아기 아비가 아이를 거꾸로 강물에 빠뜨린 이야기는 너무도 듣기 힘들었다. 그게 사실이냐고 몇 번을 다그쳐 물었고, 말을 전하는 엄마나 듣는 나나 부둥켜안고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역사적 비극을 영화로 만든 작품을 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1982년 1월의 고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고, 스크린 속의 총알이 바로 내 몸을 뚫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연히 노근리에서 관람한 영상은 시작과 동시에 내 어미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혹시나 내 기억이 편집된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물을 정도였다.
그게 바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의 실체다.
아이들도 웬일인지 숙연했다. 4학년 녀석은 뭔가 아는 듯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은 "끔찍해"를 연발했다. 사실 끔찍함을 느끼는 감정이 우리 아이들에게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쌍굴 현장도 둘러봤다.
반전도 있다. 노근리평화공원을 운영하는 위탁재단은 화단을 잘 가꾸고 있었는데 가을 장미를 집중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가을에 피는 장미? 화려하지만 상식을 거스르는 개화 시기가 노근리평화공원과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육관도 있다. 숙박시설이 잘 갖춰진 단체 세미나에 딱 맞는 장소다. 5인 실과 8인실 15인실이 있다. 대강당과 대규모 식당도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홈피에서 살펴보고 예약할 수 있단다.
돌아가는 길이 꼭 손해는 아니더라~

(201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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