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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3. 2019

글씨쓰기의 아이러니

특수학급 Y군 이야기

글씨 따라 쓰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Y군이었다. 


글을 읽지 못해도 낱말이나 문장을 따라 쓰는 학습지를 주면 군소리 없이 한바닥을 부지런히 채우곤 했다. 두 장, 세 장을 줘도 무리 없이 다 써낼 수 있었다. 필체도 아주 좋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쓴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고 예쁜 글씨였다. 


Y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씨 쓰기에 집착했다고 했다. 클레이 점토로 알파벳을 만드는 신기한 취미생활도 있었다. 글자가 담은 뜻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글자의 다양한 형태를 시각적으로 만끽하며 조형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Y군에게 글자는 미술작품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에게 글씨 쓰기는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모사하는 행위였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글씨 쓰기에 몰입한 Y군은 황홀하리만큼 행복해 보였다. 글씨 쓸 때만큼은 부산하게 돌아다니지 않았고 기괴한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Y군이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교실은 고요해졌다. 글씨를 쓸 때 그는 정말 평화로웠다.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학교에서는 시상식을 했다. 알림장을 충실하게 작성한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는데 Y군이 선정되었다. Y군은 알림장에 적은 내용을 하나도 모르고, 하나도 읽지 못했지만 유려한 필체로 빼곡히 적어 넣은 Y군의 알림장은 상을 받을 만할 만큼 아름다웠다. 생전 처음 받은 상에 Y군의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Y군은 상의 의미도 모른 채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축하를 받았다. 


물론 그는 칭찬이나 상을 받고 싶어서 알림장을 열심히 썼던 게 아니었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참을 수 없어서 열심히 썼다. Y군은 가끔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특정한 형태로 쓰지 않으면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반복하는 행위 자체를 즐기며 글씨 쓰기에 몰입하는 건 내면의 집착과 강박감이 큰 결과였다. 그 집착과 강박감이 크면 클수록 Y군의 글씨는 더 예쁘고, 완벽해졌다. Y군이 상을 받은 것을 함께 기뻐한 나였지만, 특수교사 입장에서는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그 상이 Y군의 집착과 강박감의 크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학교에 돌아온 Y군은 조금 더 자란 듯 말쑥해져 있었다. 오래간만에 글씨 쓰기를 시키는데 이상하게 그 글씨가 예전처럼 반듯하지 않았다. 글씨는 커서 칸을 튀어 나갈 지경이었고, 모양은 삐뚤삐뚤해서 못 알아볼 정도였다. Y군은 신경질적으로 "하기 싫어!"를 외치며, 학습지를 계속 옆으로 밀쳐 냈다. 전에는 잘 써서 상까지 받았던 알림장도 이제는 잘 쓰려 하지 않았다. Y군의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범적이고 성실하던 Y군이 반항하고 일탈하고 퇴행하는 것으로 보였을 거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Y군의 삐딱함이 건강한 변화의 징조로 느껴졌다.


세상에 무의미한 일은 없다지만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나설 시간에 Y군은 똑같은 글자를 똑같이 쓰고 있었다. 읽을 수도 없고, 뜻도 모르는 가로선과 세로선, 사선과 곡선의 나열에 그는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똑같은 글자를 계속 반복해서 쓰는 건 재미없어야 했다. 읽을 수도 없고 뜻도 모른다면 더 싫증을 났어야 했다. 그게 보통의 8살, 보통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반응이기 때문이었다. Y군이 글씨 쓰기를 싫어하거나, 귀찮아서 글씨를 대충 쓰는 건 보통의 8살의 아주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글씨 쓰기에 몰두했던 시간에서 벗어나니 이제 새로운 장난감, 새로운 장소, 새로운 친구에게 눈을 돌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오래된 취미생활은 잃었지만 새로운 취미생활이 생길 가능성이 생겼다. 


Y군은 이제 글자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1학기 때는 글자를 보여줘도 무의미한 발성만 했지만, 이제는 글자의 소릿값을 어느 정도 알고 읽게 되었다. 아직 틀리는 글자가 많지만, 자기가 소리 낸 것을 글자로 써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Y군에게 글자가 그림일 뿐이었다면, 이제 글자는 소리가 나는 그림이 되었다. 글자들이 Y군에게 말을 걸고, 그 뜻이 뭐냐며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냈다. 그에게 글씨 쓰기는 조금씩 '의미'있는 과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글씨에 몰입하던 예전의 그림 같은 고요와 평화는 사라졌다. 글씨 쓰기를 시키려는 선생님과 글씨를 쓰지 않으려는 Y군의 언쟁은 하루에 한 번씩 발생했다.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마다 소란스러워지기는 하지만, 그 소란 속에 Y군의 내면의 장벽이 깨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Y군의 반항은 "새로운 건 싫어요. "라는 외침이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달라지고 있어요. "라는 외침이기도 했다. 


자기 속의 거짓 평화에 빠져드는 게 비단 자폐 아동인 Y군뿐일까. 과거의 습관에 젖어 있는 건 언제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벗어나려고 하는 건 고통스럽다. 하지만 삶의 정해진 틀을 깨는 건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림이나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세상이,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세상으로 변하는 일이다. 자폐(自閉)의 닫힌 문이 스르르 열리는 일이다.  


혼자 살던 집에 누군가를 초대했다면 집이 어지러질 것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Y군의 삐딱한 글씨에서 발견한 인생의 비밀 하나가 이거다. 삐딱해졌다는 건, 많이 컸다는 증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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