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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3. 2019

백설공주의 새엄마도 엄마가 있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새끼



아기를 가졌을 때 항상 예쁜 것만 봐야 한다는데, 정작 임신 중에는 제대로 실천한 적이 없는 이 태교법을 출산을 한 후에야 실천하게 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옆에는 예쁜 것이 누워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 예쁜 것은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온종일 내 곁을 맴돈다. 해바라기처럼 환한 얼굴은 해를 찾듯 늘 내 쪽을 비춘다. 그 눈과 코와 입의 생김새는 잊어버릴 새가 없다. 전두엽에 자동 저장 시스템이라도 설정되어 있는지 일 초, 아니 그것보다 더 자잘한 간격으로 그 얼굴을 기억 세포에 덮어 씌우고 또 덮어 씌운다. 밤이 되면 그 예쁜 것은 잠 자리 인형처럼 나와 함께 이불속에 파고든다.



이젠 예쁜 일러스트를 찾아볼 필요도 화보를 뒤적일 필요도 없다. 명화 작품을 보려고 미술관에 갈 필요도 없다. 그냥 내 곁에 작품을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살아있어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작품이다. 보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나직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우유 향을 은은히 맡을 수 있고, 이로 살짝 깨물어 살의 말랑한 감촉도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출산을 한 후에야 제대로 태교를 한다.

더럽고 추한 것으로 눈을 버릴 새가 없다.

예쁜 것만 보고 예쁜 소리만 듣는다.


대신 거울을 들여다보는 횟수는 크게 줄었다. 육아를 시작하고 시간에 치여 지내다 보니 외모를 가꾸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게 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외출복은 거의 단벌에 가깝고, 화장품은 유통기한이 지난 채로 하나둘 버려진다. 요즘 내가 하는 유일한 관리는 지친 와중에도 아기 앞에 활기찬 척 애써 웃어 보이는 '표정 관리' 뿐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뒷모습>이라는 책에서 머리 손질이 '타인의 존재가 휘두르는 가장 잔인한 폭거'라고 했다.  머리 손질을 한다는 건, 뒷모습에 신경 쓴다는 것이며, 여기엔 어느 만큼의 자기희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남들이 보는 그럴듯한 '나'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아무리 공들여 땋아도 거울 없이는 확인할 수 없는 뒷머리처럼 내가 아닌 남을 위 끊임없이 꾸미고 또 꾸몄다.



하지만 아기는 내가 아무리 칙칙하고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매일 조건 없고 변함없는 사랑의 눈빛을 보내줬다. 그는 머리가 헝클어졌다고, 티셔츠 목이 늘어났다고, 혈색이 나쁘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다듬고 부담이 없어지니, 삶 훨씬 편하고 자연스럽고 떳떳해졌다. 이제 타인의 눈을 즐겁게 하기 보다는, 내 눈을 즐겁게 할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나는 가끔씩 아기를 "공주"라고 불렀다. 편견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엉겁결에 튀어나다. 어린 시절 공주 이야기를 달달 외우며 큰 나였다. 공주라고 다 예쁜 것도 아니고, 다 예뻐야 하는 것도 아닌데, 오래 굳어진 습관이라 잘 고쳐지지 않다. 그래서 아기를 얼싸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우리 공주", "예쁜 공주" 하는 게 부족한 표현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거울을 볼 땐, 재미 삼아 <백설 공주>의 내용을 바꾸곤 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라는 말끝에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해님 공주님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아기는 알아듣지 못해도, 노랫말 같은 엄마 목소리의 음률을 느끼고 방긋 웃었다. 딸내미의 이 시쳇말로 오글거렸는지, 친정 엄마가 화 구연 중간에 불쑥 끼어들었다.



"넌 너네 딸이 제일 예쁘니? 나는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예쁘다고? 그 순간 아침에 세수조차 못했다는 생각 머리를 스쳤. 이미 장성할 대로 장성해서, 아가씨라는 말보다는 아줌마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어버린 딸. 육아에 매달리느라 눈곱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밤낮 쾡한 딸의 모습 뻔히 보일 텐데, "세상에서 제일 예쁜"이라는 수식어 진심일까.



"손녀보다 딸내미가 더 이뻐?"


"그럼, 내 눈엔 더 이쁘지."



엄마의 눈에 자식은 영원한 아기로 보인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아기가 손을 빨고, 침을 흘리고, 트림을 해도 예쁜 것처럼, 나도 조금 부스스해도 엄마의 눈엔 언제나 예쁜 딸이었던 것이다.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아기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는 마음과 엄마가 나를 보는 마음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서른의 나이에 낳은 딸이 서른이 훌쩍 넘는 나이가 될 때까지 데리고 있는 동안, 친정 엄마의 눈을 밝혀준 존재 나였을 것이다. 엄마도 예쁘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잃어가는 젊음을 아까워하지 않고 나를 키웠겠지. 거울을 들여다볼 시간에 아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자기 얼굴은 잊어도 아기 얼굴은 초 단위로 기억하면서. 나는 그런 그녀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아침 밥상에 앉았고, 이도 닦지 않은 채 활짝 웃었고, 다 늘어난 트레이닝 복을 밤낮없이 입었고, 아무렇게나 방귀를 뀌고 냄새를 풍기며, 이 나이로 컸다.



앵무새는 태어나면서부터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보고 깃털 손질까지 할 수 있지만, 사람은 돌 즈음이 되어야 자신을 알아본다고 한다. 나도 거울 속에 내가 나인지 모르던 시절을 지나왔다. 거울을 볼 줄 모르던 시기에 엄마의 반응은 자기 존재가 빛인 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있다면 외모를 가지고 경쟁할 필요도 비교할 필요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최상급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 엄마에게 아기는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득, 백설 공주의 새엄마가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딸의 미모에 질투가 나서, 그녀를 제거해서라도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새엄마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건 내 새끼야."라는 말을 해주는 친정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그 미움과 분노의 폭주를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혹여 친정엄마가 살아계시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도 사랑스러운 아기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한다 살기가 좀 덜 팍팍하지 않았을까?



아기를 낳은 후 나는 누군가를 세상 전부로 삼고 살아가는 엄마의 행복을 벤치마킹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딸이 엄마의 눈길을 부담스러워할 나이가 되면 뚫어지라 보다가 들키면 딴청을 부리기도 하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진 두 눈에 넘치도록 가득 담으려 한다. 아기는 내게 지상에 없는 풍경이다. 그리고 아기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예쁜 풍경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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