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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3. 2019

따뜻한 아메리카노 미지근하게 주세요.

불편함이 부끄러움이 되는 쓸쓸한 순간


아가를 유모차에 태우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 감기가 유행인지 병원에서 한 시간쯤 대기한 것 같다. 병원 문을 나서니 6시. 벌써 밖은 어둑해졌다. 계절이 낙엽처럼 뒹굴다가 흩어질 늦가을. 바람도 살짝 차갑게 느껴져 주섬주섬 유모차에 바람막이 커버를 씌웠다.


아기 감기는 이제 다 나았다고 한다. 약 처방도 없이 병원을 나오니 다행스러우면서도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다 나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유모차를 밀고 걸어오기엔 집과 병원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일까. 아침부터 칼칼했던 목이 갑자기 더 아프게 느껴졌다.


편의점에 들려 따뜻한 유자차라도 사 마실까. 그렇지만 가는 길에 편의점이 없구나. 작은 하천을 건너면 도착할 우리 집. 다리를 건널 때 어쩐지 서늘할 것 같았다. 그래, 커피라도 사 마시자. 다리 앞에는 작은 커피숍에 있었다. 유모차를 밀며 자주 옆을 지나쳤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눈에만 담아 놓았던 곳. 입구에 큼지막한 턱이 있었지만 유모차 앞바퀴를 용기 있게 들어 올렸다. 사실 마음먹으면 못 들어갈 곳도 없었다.


카페 주인의 인상이 좋았다. 카페를 운영하는 중년 남성이 풍기는 인상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미지근하게 되나요?"

"네, 그럼요."



나는 순간 머뭇거렸다. '미지근'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게 적절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미지근'과 카페 주인이 생각하는 '미지근'의 온도는 다를 텐데.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주 뜨겁지 않을 정도만요. 손에 흘려도 데이지 않을 정도로."



말을 뱉고 나니 내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 손에 흘릴 것이 이미 자명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손에 흘릴 작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어딨다고. 대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유모차에 탄 아기에게 흘릴까 봐서요."


"네."



돌아온 대답이 너무 간명하여 되려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린 것 같아서.



"드시고 가실 건가요?"


"아니요."



카페 주인은 일회용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서 건네주었다. 손으로 적당히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딱 내가 생각한 온도였다. 손에 흘려도 데지 않을 온도. 급하게 마셔도 되면서 몸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온도.



"감사합니다."



나는 컵에 얇은 빨대를 꽂으며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며 재빨리 커피를 흡입했다.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갔다.


하지만 여유를 즐길 새는 없었다. 앉을 수도 없었다. 유모차가 답답해진 아기도 언제 칭얼거릴지 몰랐고 시간도 이미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채로 다시 한번 빨대로 커피를 주욱 들이켰다. 조바심이 났다. 예전에 한 제자가 커피 마시는 나를 보며 "선생님, 연료 충전해요?"라고 물었었지.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 자동차가 주유소에 들러 바삐 연료를 채우고 가는 것과 지금의 내 모습이 뭐가 다를까.


그래도 문을 나서기 전에 되도록 많이 마셔 두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유모차 컵 홀더에 커피잔을 꽂기 전에 어느 정도 커피양이 줄어들어 있어야 울퉁불퉁한 노면에 유모차가 흔들리더라도 커피가 넘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손이 데지 않는 온도가 필요한 이유도 그거였다.


내 사정을 알 턱이 없으니까 커피숍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좀 이상하게 보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는 유모차를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금방이라도 출발할 태세를 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문을 나서지 않고 문 앞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는 애 엄마의 모습이 말이다. 바쁘고 정신없는 내 모습과 느리고 안온한 커피숍은 얼마나 대조적인지. 그 속도 차와 온도 차가 얼마만큼인지. 나는 멀미가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가야 했다. 커피숍의 따뜻함에 내쫓기듯 나는 유모차 컵홀더에 종이컵을 끼우고 주춤주춤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뭔가라도 도와줄 게 있을까 싶었는지 카페 주인도 나를 따라나섰다. 특별히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내려가는 큰 계단 앞에 내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을 법하긴 했다. 유모차를 기울여 바퀴를 계단 아래 내려놓았을 때 계단이 높은 게 큰 잘못인 양 면구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카페 주인의 시선을 느꼈다. 난 그 미안한 표정이 계단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미안해해야 할 사람이라도 미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사과하게 하는 순간, 나는 그의 평화와 고요를 방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애써 그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해 꾸벅 인사를 했다. 문은 일부러 닫지 않았다. 아저씨의 몫으로 남겨둔 거였다. 호의를 보이려는 사람의 마음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 불편함을 누군가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아서.


다시 길을 나서는데 손이 축축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커피가 다 흘러넘쳤던 것이다. 많이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넘치는구나. 일회용 종이컵에 하얀 플라스틱 뚜껑이 갈색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뚜껑 있는 텀블러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평소엔 유모차 가방에 늘 있었는데 오늘따라 왜 두고 왔을까. 아기 물티슈로 손과 뚜껑의 커피를 닦아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보도블록은 울퉁불퉁한 데다 노면이 차도 쪽으로 경사져서 유모차는 연신 덜컹거렸다. 커피는 또 넘쳤고 나는 유모차를 세우고 커피를 닦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커피가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야 유모차가 요동을 쳐도 넘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경험으로 배운다지만 커피 맛처럼 입맛이 썼다.


문득 십 수년 전 일이 떠올랐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No 턱"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학교 정문 앞에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턱 있었다. 보행자의 편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출입구였다. 네 명의 대학생 각각 손수레를 끄는 학생, 유모차를 끄는 엄마,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짐을 든 할머니로 분했다. 그들은  올라서지 못하고 한참 그 앞에 서 있었다. 턱 하나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모두에게 리려는 거였다. 당사자가 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불편함을.

 
당시 내가 먼 훗날 가는 곳마다 턱에 걸리는 곤란한 입장이 될 줄 몰랐다. 아기를 낳고 보니 세상에는 턱이 참 많았고, 나는 자주 걸려 넘어졌다. 보이는 턱도 있었고, 보이지 않는 턱도 있었다. 문제는 턱이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라 턱의 존재가 당연하고 아무 죄가 없어 보일 때였다. 그럴 땐 아무도 안 걸리는 턱에 혼자 걸려 넘어지는 것 같아 창피 때도 있었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이 아닌, [83년생 김00]이었다. 남편은 매일 야근을 했다. 아기가 일어날 때 회사에 갔고, 아기가 잠들면 들어왔다. 그의 일은 너무 고생스러워, 내 불평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일처럼 사소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결국 원망할 대상을 찾지 못했다. 누구나 하는 육아를 혼자 감당 못 해 유난 떠는 것으로 보이거나, 징징거리는 것처럼 들릴까 입을 다물고 표정을 지운 적도 많았다. 불편함이 부끄러움이 되는 건 쓸쓸한 일이었다.
 

노면이 고른 다리 위에 올라서자 비로소 평정심이 생다.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고 한 손으로 커피를 드는 여유도 생겼다. 아기는 담요 속에서 평화롭게 잠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춥진 않아 보였다. 고개를 들어 밤 풍경을 보았다. 어디론가 달리는 차들. 결국엔 모두 집으로 돌아갈 차들. 그리고 다리 건너에 우리 집이 보였다. 아기와 유모차 무게는 얼마 안 되지만 내 마음은 주저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 활기를 찾으려고 애써보지만 이 출구 없는 막막한 느낌은 뭘까. 마음먹으면 어디든 못 갈 곳이 없지만 그 마음을 먹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한지.


빨리 돌아가야 했다. 아기의 초저녁 잠이 길어지면 안 된다. 아기 저녁을 주어야 하고 아기 목욕을 시킨 후에 늦지 않게 재워야 하니까. 얼마 남지 않은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오늘 내가 희생한 여유를 헤아려 보았다. 그 생각을 하차라리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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